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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1. 2018

황홀하고도 처절한 도망

영화 <덩케르크>를 보고

<덩케르크>는 도망치는 이야기다. 모든 이가 목숨을 지키고자 전력을 다한다. 대의명분은 없다. 그들은 그저 가망이 없는 곳에서 살아남길 원한다. 통상적인 전쟁 영화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포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이겨내는 전쟁은 없다. 오직 살아야 하는 혹은 살려야만 하는 전쟁만이 있다.  



<덩케르크>는 전쟁영화가 주는 소거의 카타르시스를 완벽히 배제했다. 악을 소거하며 승리를 쟁취하고야 마는 선은 없다. 선에게 절대적 우위를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앵글에 담겨있는 피사체들은 모두 불시착하는 포탄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지친 군인들이다.  이처럼 <덩케르크>는 상식을 답습하지 않는 역전 구성을 취했다. 멈추지 않는 공격 속에서 많은 이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목도하는 무기력함은 "날 집에 데려다줘"라는 대사 속에서 공명한다. 예고없이 소거되는 가운데 영화는 온전한 삶에 대한 갈구와 열망을 증폭시킨다. 이는 공포가 만연한 군중심리와 섞이면서 오묘한 연민마저 자아낸다.


다시 말하지만 끝내 이겨내는 선은 <덩케르크>에 자리하지 않는다.




상식으로 돌아와보자. 전쟁은 양면적인 형태이다. 대립하는 두 존재 사이에서 선악은 뒤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전쟁 영화는 이 양분화된 이념적 스탠스를 굳건하게 지킨다. <덩케르크> 역시 그러하다. 독일군이라는 악은 무자비한 공습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선에 대한 연민과 애환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확실한 편 나누기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덩케르크>는 극적 흐름을 달리 한다. 영화는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차점을 지워버리면서 초점을 이동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속 독일군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선 밖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포탄만이 그들이 존재함을 알게 해주는 매개물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것은 오로지 무차별적인 폭격에 노출된 한 공동체를 품고 있는 엄혹한 환경이다. 이렇듯 영화는 일관된 시선을 견지하며 '이겨야만 한다'에서 '살아야만 한다'로 의식적 변화를 꾀한다.




살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은 특이한 시간 구성을 통해 더욱 짙어진다. 잔교에서 1주일, 바다에서 하루, 그리고 하늘에서 1시간은 동일한 플롯 내에서 병치되며 서사적 긴박감을 증폭시킨다. 점점 좁혀나가는 시간 구성은 누군가는 시간이 많아서, 누군가는 시간이 부족해서 느끼는 불안감이 복합적으로 상존한다는 걸 방증한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 서술적 위치를 달리 했을 때 교차점이 생겨난다. 이는 사건을 다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묘수다. 잔교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군인들, 바다에서 구조를 향해 달려가는 시민들, 하늘에서 구조를 위해 당장 적을 격추시켜야만 하는 파일럿들은 사건에 진입하는 시간적 양태를 달리 한다. 하지만 모두 균일한 사고관을 향유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그것은 필연적인 반복과 개입을 거듭하면서 뇌리에 박히기 시작한다. <덩케르크>는 이 간결하고도 절실한 메시지를 삼중 구조를 통해 전달한다.



우리라는 존재감은 영화에서 개인을 철저히 지워낸다. <덩케르크> 속 등장인물들이 지닌 배경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관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오로지 덩케르크라는 전장을 대변하는 표정과 말이 전부다. 이런 특성들은 엄밀하지 못하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전장에서 발견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인물들이 숱한 총성과 포탄 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그들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어쩌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이었을 뿐이다. <덩케르크>는 개인을 지우면서 개인이란 존재가 전장에서 마주하는 우연성,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안감과 미약함을 선명하게 만든다. 오히려 영화는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개인들이 모여 형성한 공동체로부터 희망을 끌어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강한 연대의식을 기반으로 영화는 차분한 기조를 이어나간다. 영화 속에는 공포와 슬픔에 젖어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없고 혼자 살겠다며 몸부림치는 절규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절체절명 속에서 과잉된 감정이 일순간 폭발하긴 하나 곧 제자리를 찾는다. 삶과 죽음 사이 얕은 경계선에서 이토록 묵직한 평정심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단연 연대감이다. 연대감에는 명징한 두 가치만이 존재한다. 나는 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과 같이 살자는 공동체적 선의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며 지평선 너머에 있을 고향을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에서조차 여전한 굉음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명료한 목표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덩케르크>는 천천히 나아간다.



병사들은 무사히 귀환했을 때 패잔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살아있으니 됐다는 위로와 박수였다. 영화는 끝까지 삶에 대한 집착이 전쟁에서 죽을 용기와 반대급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불가능이라 여겼던 작전 속에서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시민들에게 공허한 죽음만이 떠도는 전장 속 탁한 공기를 뚫고 피어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극명한 시선이 대치되면서 공동체 의식은 빛을 발한다. 전쟁에선 결국 적을 섬멸하는 가치 이전에 공존할 수 있는 미덕이 우선된다는 걸 영화는 강조한다. 이런 가운데 신문 속 처칠의 연설은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것이 왜 우리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열차 속 창을 사이에 두고 다르게 조명되는 일반 시민들과 군인들이 조우하는 순간 이 메시지는 사뭇 자명하게 다가온다.


<덩케르크>는 공존을 역설한다. 다 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 속에서 발현되는 휴머니즘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 힘은 평범하고도 나약하지만 절실한 개인들로부터 비롯된다. 특정하지 않은 다수는 영국군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전우이지만 고향에 있을 누군가의 가족이기도 하다. 영화는 공동체가 소중한 가족으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 이제 '이것은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되새기며 다음을 생각할 차례다. 


전쟁은 그저 생존을 말하기 위한 역설적인 매개였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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