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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4. 2018

영악한 자본만이 살아남는다

영화 <파운더>를 보고

맥도널드는 어디에나 있다. 이 거대한 패스트푸드 체인은 빅맥 지수(Big Mac Index)라는 고유명사까지 얻었다. 이처럼 맥도널드는 한 국가가 지니는 물가 기준을 상징하기도 한다. <파운더>는 이 거대한 문화가 시작된 지점으로 들어간다. 레이 크록은 교본 같은 판매용 멘트를 입에 달고 밀크셰이크 믹서를 판다. 그러다 우연찮게 캘리포니아에서 맥도널드 형제가 운영하는 햄버거 식당을 마주친다. 드라이브 인(Drive-in)이 유행하던 시절 과감하게 손님들을 줄 세우고 공허한 기다림 대신 30초 만에 따끈한 햄버거를 쥐어주는 이 곳. 그는 여기서 혁신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에 맥도널드 형제가 회고하는 장면은 순수하고도 정직한 아메리칸 드림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오로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혁신을 통해서 손수 성공을 일궈냈다. 형제에게 감화된 레이는 프랜차이즈 사업 확장을 제안한다. 주저하는 그들에게 그는 황금 아치를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새로운 교회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닌 새로운 문화 지표를 설정하겠다는 원대한 꿈은 선명한 계약서와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파운더>가 담고 있는 실화는 아름다운 공생과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굳건하고도 정직한 원칙이 집요한 욕망에 잠식되어가는 슬픈 신화에 초점을 맞춘다. 계약서 사인이 비춰진 이후 주인공은 더 이상 맥도널드 형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레이가 분출하는 거대하고도 끈질긴 열망이 비춰진다. 그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사업 확장에 성공할수록 맥도널드 형제에겐 짙은 그늘이 자리한다. 이들은 서서히 원칙과 이윤이라는 거대한 축 사이에서 치열하게 반목을 거듭한다. 갈등이 커질수록 본질적인 문제는 서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형제에겐 없으나 레이에겐 있는 것. 바로 원대한 야망이다.



야망은 빠르게 현실을 앞질러간다. 속도위반에 잡히기라도 한 듯 그에게 타협을 위한 순간이 찾아온다. 사업 확장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신용을 담보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저당을 잡혀야만 한다. 고민 끝에 그는 아내와 상의조차 없이 집을 저당으로 잡는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 아내는 레이에게 집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내 성공에 대한 욕망이 단란한 가치마저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일했을 때 가족은 절실한 동기부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자신을 성공이란 반열에 올려놔줄 수 있는 기회 앞에서 가족은 현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처럼 냉정하고도 독단적인 그의 선택은 훗날 맥도널드는 가족이라고 외치는 가족적인 사업 신조에 절묘하게 위배되는 이중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 속 중요한 전환점은 레이가 회계사인 해리를 만나는 대목이다. 해리는 레이가 햄버거 사업이 아닌 부동산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며 사업 운영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전환을 제안한다. 이들은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땅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부터 수익이 필요함을 직감한다. 따라서 프랜차이즈에 임대를 놓는 방식을 택한다. 이때부터 사업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파급력을 높여간다. 다시 성공신화에 파란불은 들어왔지만 여기선 중요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가족을 모토로 내세우며 휴머니즘에 기초한 사업을 일궈오던 그가 가족을 통제하며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이게 되는 아이러니는 현대 자본이 수반하는 무자비성을 목도하게 한다. 인정(人情)을 철저히 외면케 하는 냉정함은 간간히 인간다움을 강조하며 일갈하는 맥도널드 형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당신은 도대체 뭘 했냐고 묻는 맥도널드 형제에게 레이는 승리할 수 있는 정신을 고안했다고 자부한다. 영화는 이 개념을 안목과 선택, 그리고 실행이라는 3요소로 압축한다. 레이가 사실 창의적인 인물은 아니다. 이미 시도됐던 것이나 누군가가 던진 조언에서 영감을 얻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선택하고 실행하는 과감한 과정을 이행할 줄 안다. 관찰에 익숙한 그는 보편에서 벗어난 특별함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자기 확신에 근거한 선택을 한 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긴다. 주저함이나 지레짐작은 선택지에 없다. 폐부를 찌르는 질문에 그가 답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답을 영화는 상세하고도 열정적으로 전달한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게 레이는 거대한 성공을 일궈낸다. 그가 보여주는 성공은 엄밀하게 시대를 정확하게 읽어낸 것에 대한 보상이다. 뉴딜 정책과 세계 대전이 야기한 소득 평등은 많은 중산층이 풍요로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1950년대는 모두가 균질한 것을 누리고자 하는 대중성의 시대가 되었다. 레이는 이런 변화에 발맞춰 미국 내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똑같은 황금 아치와 햄버거를 꿈꿨다. 꿈은 곧 실현됐고 모두가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강조하는 도전과 끈기가 지속됐기에 가능했다.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해 개척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철도를 놓았던 선조들처럼 그 역시 혈혈단신으로 동서를 오가며 신화를 만들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넓은 대지를 비추는 장면들은 그가 닿고자 하는 영역에 한계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속 시작과 마지막은 상당히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작엔 간절함이 배어있지만 마지막엔 능글맞은 여유가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1970년대로 넘어와 바라본 레이는 여전히 당당하고 도전적이다. 화면을 응시하며 옅은 웃음을 띠는 그는 맥도널드 형제를 비트족이라 일컬은 것처럼 1920년대 대공황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세대에 대한 조소를 내비치는 것만 같다. <파운더>를 멋진 성공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빛나는 부를 즐기며 턱시도를 챙겨 입는 마지막 뒷모습에서 성공한 자에 대한 동경 대신 자본주의가 써내려간 씁쓸한 잔혹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만간 가까운 황금빛 네온사인을 찾아 빅맥을 먹게 될 것이다. 이것 역시 씁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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