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 시점 Oct 28. 2018

그 죽음 앞에 한없이 비겁하라

영화 <킬링 디어>를 보고

감정이 배제된 비극이다. 슬프기에 비극이거늘 그 어디에도 표정은 없다. 참으로 건조한 역설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질척거리는 감정을 말끔히 씻어내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정제된 윤리의식을 펴 바르곤 한다. 전작 <랍스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 사랑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감정을 위한 자리는 없다. 영화는 오직 그 감정이 그토록 절실한가에 대한 질문만을 생각한다. 인물들은 경직된 이성으로 점철됐다. 이들이 스스로 휴머니즘을 지워갈수록 비극은 선명해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목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곧 감정이다. 체계적인 이성이 관장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 이성을 도구로 선택한 인물들은 필사적으로 동분서주한다. 불가능을 향한 희망을 움켜쥐는 모습에 비극은 점차 희극으로 변모한다. 그렇게 란티모스 감독은 감정이 에워싸고 있던 인간 내면과 본질적인 치부를 발가벗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다움을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다움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란티모스 감독이 차가운 시선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킬링 디어>는 복수라는 서사를 다룬다. 여기엔 오랜 인류 역사가 빚어온 윤리학이 가미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 속 조항. 이 상응보복법을 통해 영화는 복수도 동일하게 계량된 아픔으로 성사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토록 무정한 현장에는 소년 마틴과 의사 스티븐이 자리하고 있다. 마틴은 스티븐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이 술을 마신 상태에서 아버지를 수술하며 사고를 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티븐을 명백한 가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정황상 의심만 존재하는 모호한 상황에서 그를 가혹한 심판대 위에 올려놓을 뿐이다. 불행 중 다행은 이 서사가 단심제를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틴이 행하고자 하는 복수는 마냥 일방적이지 않다. 체계적인 단계가 존재하며 복수할 대상에게 선택권마저 부여한다. 우선 마틴은 스티븐에게 아버지가 될 기회를 준다. 그를 통해 상실감을 씻어내고 결핍된 정서를 스티븐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은 결핍과 거리가 멀다. 당연히 안정적인 일상을 깨뜨릴 이유도 없다. 마틴이 지닌 의중을 모르는 그는 이 당혹스러운 제의를 뿌리친다. 그저 피상적이면서도 물질적인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 머물 뿐이다. 



종종 스티븐은 마틴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이해를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늘 닥친 상황 앞에서 짤막한 고민과 공감을 보여주는 게 전부다. 마틴은 차가운 분노를 머금고 아버지라는 지위로 속죄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이 무거운 제의를 대신하기엔 이해한다는 말이 지닌 깊이감은 너무나도 얕을 따름이다. 사실 스티븐은 스스로 인간답고자 노력하지만 정작 타인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실로 이기적인 윤리성이다. 이런 가운데 이해한다는 말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선적인가. 마틴은 언제나 표정 없는 위로를 받았을 뿐이다. 그제야 소년은 깨닫는다. 아픔은 등치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가식적인 관계를 비틀기로 한다.


이내 비극적인 역설을 잉태한 아픔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파멸하는 숙명을 방관하게 만든다.


끝내 마틴은 스티븐으로부터 가족을 앗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영화는 이 시점부터 소년에게 전지전능한 힘을 쥐어준다. 그에게 주어진 무자비한 칼날은 피로 물든 채 육신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아들 밥과 딸 킴은 모두 사지가 마비된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란티모스 영화에서 기이한 현상을 규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저주가 체현되는 과정에는 논리가 아닌 상실이라는 정서가 주인공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정서가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걸 확인할 뿐이다. 급기야 피눈물까지 흘리는 지경에서도 영화는 스티븐 가족에게 슬퍼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촘촘하게 가해지는 압박 속에서 스티븐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누군가를 직접 죽이는 비극으로 비극을 끝내거나 모두를 잃는 비극을 맞이하거나.


생이 다해가는 것을 목도하자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친다. 합리적인 이유를 찾고자 노력했던 아내 애나마저 공포에 휩싸여 무기력해진다. 모두 살고자 하지만 공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절대적 지위를 지닌 분노가 목전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마침내 스티븐은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로 한다. 여기서 영화는 희비극으로 전환된다. 생사가 갈리는 현장에 부성애, 모성애, 헌신, 사랑 따위는 없다. 극단적인 공포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든다. 끝내 각자에게 내재된 부끄러운 치부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낯뜨거운 슬픔에 젖는다. 연민과 치욕으로 범벅이 된 가족은 죽음이라는 그림자마저 맞이하게 된다.


스티븐은 복면을 쓴 채 총을 돌고 제자리를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 대상은 선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의를 위한 숭고한 선택을 운에 맡겼다. 필연적인 죄책감에서 일말이나마 자유롭고자 비겁한 회피를 택한 것이다. 최대한 이 비극에서 당사자라는 지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는 방향을 바꿔가며 온 힘을 다해 제자리를 돈다. 슬프면서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장면에서 결국 죽음이 모습을 나타낸다. 우연을 가장한 총구가 끝내 어린 목숨을 앗아간 순간, 붉은 선혈이 화면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과연 스티븐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제 마지막을 바라보자. 시끌벅적한 식당이다. 스티븐 가족은 마틴과 조우한다. 그들은 여전히 표정이 없다. 희로애락을 가늠할 수 없는 가운데 그들은 식사를 하고 있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식사다. 평온하게 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인물들은 섬뜩하리만큼 차분하다. 끝내 한 목숨을 앗아가며 복수를 치른 마틴이 무색할 정도다. 소년은 동일할 수 없는 상실감을 숫자로나마 맞춰가며 상쇄하고자 노력했다. 비상식적인 행보를 걸으며 쟁취한 줄 알았던 상식의 세계는 다시 비상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해방될 수 없는 굴레가 선사하는 새로운 공포다.


나약했기에 이기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끝내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영화 서두에는 수술대에 오른 심장이 보인다. 심장은 인간을 존재하게도 만들며 죽게도 만든다. 가열차게 뛰던 심장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생동감을 잃었다면 영화에서 사라진 인간다움을 함께 안고 가지 않았을까. 끝까지 선명한 것은 오직 담담하면서도 비겁한 무표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유에서 자유를 갈망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