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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6. 2018

자유에서 자유를 갈망하다

영화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을 보고

시대를 불신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법과 질서는 부조리한 허울이다. 상식은 가식적인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허식으로 가득한 사회를 등진 그들은 너른 들판을 택했다. 여기에는 울타리가 없다. 스스로를 옥죌 이유가 없다. 타인을 의식하며 부자연스러울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저 통념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을 하며 자유를 외칠 따름이다.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자유를 위한 저항을 원동력으로 삼는 집단을 주목한다. 영화는 도입부부터 오감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광활한 들판을 거칠게 내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오가는 욕지거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그 사이 카메라는 요리조리 돌아가는 핸들에 초점을 맞춘다. 위험해보여도 누구 하나 말리는 이가 없다. 그저 자동차는 열기와 광기를 머금은 채 광란의 질주를 이어간다. 심지어 불안함조차도 여유로운 미소로 상쇄시킨다. 이것이 자유로운 삶을 자부하는 이들이 몸소 증명하는 일상이다.  



집단을 이끄는 콜비는 제도권에서 탈피한 채 독자적인 연대의식을 구축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기존 교육과 사회체계를 전면으로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사상을 강요하듯 설파한다. 자유로운 삶을 독단적으로 제시하는 모습은 신랄한 욕설과 함께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아들 채드와 손자 타이슨도 이런 굴레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분명 자유롭게 성장했다. 그러나 정작 선대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역설적인 일상에서 숱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천륜을 끊어내지 못한 채 가족이란 애증어린 이름을 되새길 뿐이다. 그들은 자유와 생존 모두를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두 가지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현실적인 갈등을 통해 방증한다.

 

채드는 결핍된 것이 많다. 그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일반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렇게 도달한 현재는 아버지를 따라 범죄를 자행하는 문제 그 자체다. 그는 잘못된 전철을 자식이 밟지 않길 바란다. 그 결과 타이슨은 학교를 다니며 집단이 거부하는 상식을 습득하게 된다. 이는 콜비와 새로운 마찰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세대를 이어가며 집단이 존재하는 이유에 도전하는 상황인 셈이다. 콜비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가족에 대한 연민에 휩싸인다.


이처럼 부성애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열망 가운데에 이질적으로 자리한다.



영화 속에서 타이슨은 새로운 미래다. 콜비는 손자가 이 세계를 이어받길 원한다. 하지만 채드는 확실하게 선을 긋고자 노력한다. 그는 아들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는 길은 자신이 가닿지 못했던 질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폭력적인 저항의식과 황당무계한 진리를 강요하는 콜비는 채드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이 없다. 영화는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 침범을 보여준다. 콜비가 피력한 자유의지를 침범했던 기성사회와 채드와 타이슨을 침범하는 콜비가 병치된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로소 집단 안팎에 존재하는 적대적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맞물리며 충돌하는 가족은 비극성을 가중시킨다.



콜비 집단을 부당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찰은 불법적인 이들을 주시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는 언제나 뒤를 쫓는다. 그나마 이런 모습은 안전한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채드와 친분이 있는 이웃주민들조차 콜비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결국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고자 하는 채드는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한다. 결국 자유를 찾아 떠난 이 집단에게 관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빛을 찾아 손을 내밀었던 채드는 전전긍긍한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은 울타리 밖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경찰은 그런 아이들을 미끼로 삼아 채드를 잡으려고 한다. 그는 중대한 기로에 섰다.   


채드에게 타이슨은 희망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아무리 삶이 거칠어도 아들한테 좋은 것만 주고자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마주했던 자유를 버리기로 한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는 철저하게 무언가를 배제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채드가 타이슨에게 물려준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였다. 여기서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과연 지구는 평평한가?’라는 질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이슨이 이에 대해 질문하자 콜비는 명확하게 그렇다며 단정을 짓는다. 하지만 채드는 스스로 알아보라는 말을 건넨다. 알아서 생각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투영된 답변인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자유가 아들에게 건네진 순간에 과연 채드는 무엇을 느꼈을까.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미명을 앞세운 가치가 지닌 미세한 경계를 과감하게 들어낸다. 혈연이란 굴레를 사이에 두고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가족이란 존재를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애틋한 부성애가 고스란히 녹아든 셈이다. 어쨌든 벽에 금이 가야 빛이 들어온다는 칼 마르크스의 말처럼 끝내 채드는 관념이란 케케묵은 벽에 균열을 형성했다. 그리고는 아들을 향해 당당하게 커틀러 가문임을 외쳤다. 만약 무법적인 집단에 새겨지는 가문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면 적어도 그는 좌절을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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