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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6. 2018

저마다 슬프고 외롭다

영화 <디태치먼트>를 보고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존 키팅은 캡틴이라 불린다. 그는 교탁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모두가 올라서길 바란다. 그는 앉아서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발견한다. 그 순간부터 지식과 통념으로 직조된 교육은 무의미해진다. 캡틴은 가르치지 않는다. 무수한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 인생을 조타하는 법을 알려줄 뿐이다. 현명한 스승과 깨우친 학생들이 일궈내는 조화로운 앙상블. 이것이 영화가 그려낸 이상적인 교육이다. 이후 등장한 교육영화의 클리셰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디태치먼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디태치먼트>엔 이상이 없다. 현실만이 존재한다. 학교는 환멸과 분노로 얼룩진 청춘들로 가득하다. 눅눅하게 찌들어버린 교육현장에서 교권은 무겁고 교사는 무기력하다. 주인공인 헨리 역시 냉소적이다. 그에겐 감내하기 힘든 두 가지의 현실이 존재한다. 문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시교사로 살아가는 삶과 병마와 싸우는 아버지를 돌보는 삶이 그것이다. 헨리에게는 열정이 없다. 카메라가 비추는 그는 처진 어깨를 이끌고 무거운 일상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교탁 앞에 선 그에겐 염세에 찌든 피로감이 선명하다. 그나마 옅은 사명의식만이 위태롭게 그를 받쳐줄 뿐이다.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현실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혼돈 속에서 그들은 번민과 고뇌에 휩싸이며 처절한 탈주를 감행한다. 모멸에 찬 절규와 폭언을 퍼붓는 장면들을 바라보라. 처참하게 일그러져 평정심조차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다. 영화에는 무조건 희생을 종용받는 집단이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이해와 용서가 가능한 집단도 없다. 고통과 체념은 동등한 선에서 적용된다. 결국 영화가 바라보는 연민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맞춰진다. 이쯤에서 다시 말하고 싶다. <디태치먼트>에 존 키팅은 없다. 


플롯 속에는 슬픈 눈으로 허망한 원칙만을 고수하는 교사들만이 즐비하다.


결국 영화는 교사에게 이상이란 짐을 지우지 않는다. 대신 상식을 거부하는 현장에서 무심할 자유를 준다. 학교 안과 밖이 동시에 조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시적인 평가만을 종용하는 교육현장은 학생들에 대한 진정성을 수반하지 않는다. 노력을 이어가봤자 무위로 돌아갈 것이 자명한 환경은 퇴근한 교사들이 마주하는 무료한 일상과 다르지 않다. 벗어날 수 없는 진부함 속에 갇혀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학생들에 대한 무심함은 어쩌면 유일무이한 숨통이다. 이렇듯 교육대상에 대한 철저한 타자화는 간명한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교사로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이 교사로서의 자신을 무색하게 만든다는 슬픈 역설은 핍진한 현실 그 자체다.  



그렇다고 <디태치먼트>에 절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메레디스와 에리카라는 두 소녀를 헨리 앞에 제시한다. 변화를 모색하게끔 하는 것이다. 상처로 얼룩진 두 소녀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헨리는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이들은 감정을 공유하며 간극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헨리는 다가서는 법을 익힌다. 늘 임시라는 단어를 자신 앞에 붙이며 친밀을 경계했던 그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학생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한 한계점을 맞이한다. 이유는 헨리 개인에게 기인한다. 영화는 중간에 헨리가 지나온 과거와 생각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와 강박들이 그로 하여금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아픔을 완연히 어루만지고 보듬어주기엔 스스로가 지닌 아픔을 건사하기에도 벅차다는 사실 역시 선명해진다. 슬프게도 영화 제목처럼 개인이 지닌 슬픔들은 융화될 수 없다. 그리고 잔인하리만큼 서로를 밀어낸다. 이윽고 다시 간극이 생겼다. 세 사람은 삶을 맞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조명되는 교육은 두말할 필요 없이 괴롭다. 


누군가를 가르치기에 그저 부족한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연 헨리가 읊조리는 독백이다. 독백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한 이야기와 같다. 그는 믿음에서 배신으로, 배신에서 절망으로 가닿는다. 이런 인식은 가르침을 주는 입장에서 가질 법한 희망과 냉철한 현실인식이 충돌하며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가 교사로 살아오며 축적한 절망들은 어린 시절 속 상처만큼이나 곪아있다. 헨리는 덤덤하게 교육에 대한 필요와 한계를 말한다. 그것은 비록 조용할지언정 진심을 다해 고민한 자에게 새겨진 치열한 흔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헨리는 다시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된다. 누구나 문제가 있지만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그의 전언처럼 아픔은 고독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야속하게도 현실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디태치먼트>는 우리에게 말한다. 절망으로 귀결되는 교육 현실이 최선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무심함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문제라면 해결책은 관심에 있다. 헨리는 학생들에게 마음의 무게를 느껴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있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손을 든다. 혼잡한 엇갈림에서 비춰진 짧은 순간은 작은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97분에 걸친 고백은 유리된 사회를 봉합할 수 있는 힘을 갈구한다. 문제는 간단하고도 어렵다. 어쩌면 영화 서두에 헨리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구절 속에 혹시나 답이 있을지 모른다. 일단 살펴봐야할 계제다.


나는 돈처럼 주인이 바뀐다. 두 손이 돈처럼 변했다. 내가 산 램프에서 지니가 나와 큰 소리로 울었다. 그 눈물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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