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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6. 2018

질기고도 가혹한 죄악이여

영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를 보고

시드니 루멧의 시선은 예리하다. 그가 보여주는 섬세한 연출은 섣부른 확증과 편견을 효과적으로 배제시킨다. 데뷔작인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한 소년이 존속살해로 유죄를 받자 배심원 한 명만이 반대를 표명한다. 이후 영화는 첨예한 논쟁을 통해 다양한 시선을 불러온다. 한 인간이 지닌 서사를 다각도로 관찰해야 비로소 합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루멧의 철학은 50년 뒤 유작이 된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플래시백 효과를 동반해 비춰지는 상황은 서스펜스를 고조시킨다. 더불어 필연적인 비극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무력감을 동반한다. 


그렇게 루멧은 가족이라는 운명을 격렬하게 거스르는 참상을 주목했다.  



형제인 앤디와 행크는 돈이 없다. 절망에 빠진 그들은 끝내 강도질을 선택한다. 놀랍게도 대상은 보석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이다. 앤디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며 행크에게 일을 맡긴다. 하지만 담대하지 못한 그는 지인인 바비와 함께 일을 꾸미게 된다. 범행 당일 그들은 호기롭게 계획에 착수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격으로 인해 바비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중태에 빠지게 된다. 범행이 실패로 돌아가자 형제는 일을 무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 찰스는 참극의 원흉을 찾고자 동분서주한다. 이처럼 영화는 부모를 향한 형제의 칼날이 머금고 있는 궁핍한 현실과 절망적인 분노를 여실히 보여준다.


범죄를 구성하는 주체가 가족이라는 점은 원죄적인 속성을 부각시킨다. 천륜에 대한 죄의식을 차치하게 만드는 절망적인 현실에 형제는 가늠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패륜적인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금기된 성역을 뛰어넘고자 하는 교만은 철저하게 육신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로 인해 가족이라는 원관념은 붕괴된다. 


영화 속에는 오로지 이기적인 본능만 꿈틀대는 야만성이 만연한다.



형제 사이에는 연대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고립되어 있다. 행크는 이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양육비라는 금전적 관계로만 가족과 연결된 상태다. 이마저도 없다면 그는 절박한 상실감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앤디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인 지나와 서로 육체적으로 탐닉할 뿐이다. 그들 사이에 정서적인 교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있다. 고로 가족이란 의미에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다. 이렇듯 영화 전반에 산재하는 미약한 관계들은 형제로 하여금 과감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영화는 찰나가 야기한 파멸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보여준다. 앤디는 익숙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부모의 가게를 노렸다. 행크는 한사코 거부하다가도 앤디가 건넨 선금을 보고 마음을 바꾼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당장 돈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함에 몰려 가족에게 칼날을 겨눴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하고 사방에서 위험한 함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지에 몰린 형제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한다. 그저 즉흥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뿐이다. 이토록 무계획한 행보는 마침내 파국을 앞당긴다. 영화는 무너지는 군상 사이에서 요동치는 불안과 충동을 절묘하게 버무린다. 그리고 이내 일탈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절감케 만든다.



플래시백을 활용한 서사 구조는 촘촘하게 얽힌 비극을 조명한다. 영화 서두에서 강도질에 실패하고 절규하는 행크의 모습은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영화는 과감하게 과거로 시점을 옮겨 강도 계획과 연루된 모든 이들을 비춰준다. 이들은 모두 강도질이라는 선택이 불가피했고 필연적인 비극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를 보여준다. 형제는 생존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는 부모가 적절한 대상이었다. 마침 앤디는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온 상황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잉태했던 불화가 터져버리면서 자멸하는 처참함은 가족이라는 단어와 맞물려 더욱 적나라하다. 


영화는 배경을 밝히며 작은 연민을 둔다. 하지만 결코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형제는 엄연히 질서에 어긋나는 범죄를 저질렀다. 심지어 앤디는 마약과 분식회계라는 중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두 사람은 살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처럼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총이 우리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가짜 총으로 시작한 범행이 핏빛 총성으로 물드는 과정이 쌓여갈수록 형제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루멧은 암적인 습성만 고착화시키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형제를 통해 표현한다.


문득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 생각난다. 요조는 현실 속 불안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만약 그가 이 지독한 살의를 외부로 돌렸다면 아마 이들과 같지 않았을까. 물론 요조는 풍족한 부자가 느끼는 공허함이라는 역설을 견디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세속적이면서도 질긴 장력을 끊어내지 못한다. 인물들이 끝내 자기 파멸로 치닫는 모습은 순수한 생존 의지마저 짓밟는 비정한 사회를 조명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일상 속 미미한 균열을 방치한 자들에게 파멸이라는 극단을 통해 일갈하고 있다. 아일랜드 건배사에서 차용한 제목처럼 달콤한 30분을 위해 맞이하고야 마는 악마적 고통은 곧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다. 헛되이 일장춘몽에 빠졌던 앤디와 행크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직면했다. 그토록 지독한 어둠만 가득했던 영화는 하얀 빛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원죄로 물든 세상에 퍼진 빛은 과연 구원이었을까. 아니면 철저한 사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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