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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30. 2022

잠실의 마지막 뱃사공

교량이 건설되자 일자리를 잃은 사공들

한강에 교량이 놓인 자리는 예전에 나루터였다. 한남대교 북단과 남단에는 한강나루와 사평나루가, 영동대교 북단과 남단에는 뚝섬나루와 청수골(청담)나루가 있었다. 그리고 양화대교와 천호대교 자리에 양화진과 광나루가 있었던 것처럼 한강의 거의 모든 교량 자리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나룻배가 오가던 물길에 다리를 놓은 것은 그 자리가 한강 남쪽과 북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끊어진 육로를 수로로 이은 것. 지난 글에서 다룬 잠실도 한강의 섬이었던 시절 나루터가 있었다.

             

▲ 잠실 석촌호수의 송파나루터 표지석 예전에 잠실이 한강의 섬이었을 때 나루터가 있었다. ⓒ 강대호


역사 기록과 문학 작품 속 잠실의 나루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인조 임금이 병자호란 때 잠실의 나루터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시(酉時)에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이었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25,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 故事本末)


인조가 한강에서 신천과 송파의 두 나루터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다. 신천나루는 지금의 자양동에서 잠실섬 북쪽의 신천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이고, 송파나루는 섬의 남쪽 잠실리에서 송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김훈 작가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앞서 걸으며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어가행렬은 사공이 흔드는 횃불의 방향을 따라서 강을 건넜다. - 김훈  <남한산성> 중


<대동여지도>을 보면 잠실섬의 지리적 성격을 알 수 있다. 한양 도성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지도에서 길은 검은 선으로 표시되었는데 육로를 거쳐온 길이 잠실을 관통해 다시 육로로 이어지고 있다. 육로를 수로로 연결하기 위한 나루터가 잠실섬 북쪽과 남쪽 두 곳에 있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언급한 신천과 송파.


잠실섬의 나루터를 넓은 시각에서 보면 경상에서 충청을 거쳐 경기도 광주를 지나온 길과 뚝섬을 지나 광희문을 거쳐서 한양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했다. 

             

▲ 대동여지도의 송파 인근 지도에서 길은 검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파란 원이 송파, 빨간 원은 잠실, 노랑이 남한산성, 초록은 도성이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다리가 놓여 일자리를 잃게 된 사공들


한강에 나루터는 언제까지 존재했을까? 과거 기사를 보면 교량 건설과 함께 그 기능을 서서히 잃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뱃사공도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고. 


<경향신문> 1970년 10월 16일의 '서울, 새 풍속도 (8) 나루터를 쫓는 다리' 기사는 "다리가 놓이고 나면 나루터는 할 일이 없어"지는 현실을 다룬다. 당시 건설 중인 '영동교'와 '잠실교'를 언급하며 "잠실, 뚝섬, 송파나루도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측한다. 


또한 기사는 "신천나루터에서 31년간 사공으로" 일해온 양인환씨의 사연을 전하며 그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비사도 함께 소개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 일행을 양씨의 선조가 건네줬다는 것. 역사적 순간을 목격했던 뱃사공 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조선일보> 1972년 1월 11일의 '떠나야 하는 최후의 뱃사공, 잠실교 준공 앞둔 숙이 아버지' 기사는 잠실대교 준공을 6개월 정도 앞에 둔 신천나루와 사공의 모습을 전한다.


1949년부터 신천나루에서 나룻배를 몰아온 숙이 아버지, 김용태씨의 사연은 나룻배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열 명 정도 타는 작은 배였지만 2톤짜리 배를 거쳐 5톤짜리 배로 커졌고, 노를 젓는 방식 대신 통통배가 뒤에서 나룻배를 밀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그런데 숙이 아버지는 월급 사공이다. 승용차 여러 대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배의 규모는 커졌지만 숙이 아버지의 벌이는 시원찮다. 그나마도 잠실대교가 준공되면 일자리도 잃게 된다. 이참에 숙이 아버지는 "가재를 팔아서 채소 장사라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기사는 전한다.


<조선일보> 1972년 7월 1일의 '나룻배에 판자집, 가족 싣고 그 뱃사공은 떠났다'는 기사는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잠실대교 개통 전날에 신천나루의 어느 사공이 "자신이 몰던 4톤짜리 나룻배 위에 그가 살던 오막살이 한 채를 고스란히 떠얹고 세간과 식구와" 한강 하류로 떠나는 모습을 전하는 기사다.


주인공은 "신천나루 최후의 뱃사공 송택슬(44)씨"였다. 그는 '숙이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위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채소장사를 해보겠다던 그 숙이 아버지다. 하지만 숙이 아버지는 "장삿길로 들어서려고 이사 준비를 하다 지붕에서 떨어져 오른쪽 팔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송씨에게는 어떤 계획이 있었을까? 그는 "물 따라가다가 마땅치 않으면 강가에서 채소나 지어먹겠다"고 소원을 밝힌다. 한강 하류의 나루터 이곳저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여의찮으면 농사를 짓겠다는 것. 일자리를 잃어도 강가를 떠나기 쉽지 않은 사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신천나루는 1972년 6월 20일에 폐쇄되었다. 1971년만 해도 12명이던 사공이 다리 준공을 앞두고 서서히 떠나 폐쇄될 때는 5명만 남았다고. 하지만 송씨가 일자리를 얻으려고 향한 한강의 하류도 조만간 나루가 없어질 것은 분명하다고 기사는 전한다. 

             

▲ 나룻배에 오막살이 싣고 한강 하류로 떠나는 신천나루의 마지막 뱃사공 조선일보 1972년 7월 1일의 ‘나룻배에 판자집, 가족 싣고 그 뱃사공은 떠났다’ 기사. ⓒ 조선일보


숙이 아버지는 신천나루에서 가장 오래도록 배를 탄 사공이라는 상징성이 있었는지 여러 기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언급된다. <동아일보> 1972년 12월 29일의 '1972년 주역을 찾아. 신천 마지막 뱃사공 김용태씨' 기사에도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잠실대교 준공 6개월 후였다. 


기사에서 김용태씨, 숙이 아버지는 "성수동의 한 규석 분쇄 공장"의 인부가 되었다. "신천나루터의 마지막 뱃사공이었"고, "잠실섬 토박이로 자라나" 25년간 "뱃일"만 해온 그가 "삿대를 잃고 돌 부수는" 인부가 된 것이다. 


이 기사는 "도시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사공들이 나루터를 떠나가는 현상"을 언급하며 당시 한강 나루터들의 운명도 예언한다. 나루터는 물론 뱃사공까지 사라질 것이라는 기사의 예언은 오래지 않아 이뤄졌다. 


한강의 뱃사공만 사라졌을까?


뱃사공뿐 아니라 개발 시대를 거쳐오며 사라진 직업들이 많다. 전화 교환수나 버스 안내원이 그렇고 영화관 간판 화가나 타자수가 그렇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기술과 산업의 변화에 따라 직업 세계가 요동치고 있고, 특히 옛것과 새것의 모호한 경계에 선 직업들이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낸 <2020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8년 동안 8개의 직업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유로 기술 발전과 디지털화를 든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는 직업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강의 뱃사공처럼.


한편, 1970년 10월에 착공해 1972년 7월에 준공한 잠실대교는 한강의 여섯 번째 다리가 되었다. 이후 강남과 강북은 물론 경기 남부와 경기 북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발전한다. 지금은 서울 시내버스를 포함해 구리, 남양주, 의정부, 포천, 그리고 성남, 광주, 용인 등을 잇는 30여 개의 노선버스가 오가는 복잡한 다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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