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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02. 2019

강남 → 목동 → 분당 ... 지금은 옥상집에 삽니다

[옥상집 일기 ⓵] 4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돌아보니 난 40년 넘게 아파트에서 살았다. 1976년 12월부터 아파트에서 살았으니까 어쩌면 난 대한민국 아파트 개발 역사와 함께 살아온 걸 수도 있다. 학창시절인 80년대까지는 강남에서 살았고, 대학 졸업 후 90년대에 잠시 목동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혼 후 2000년대부터는 쭉 분당에서 살고 있다.    

 

어릴 때는 빈 땅마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걸 보며 자랐다. 강남에 부동산 열풍이 부는 걸 눈으로 직접 본 거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는 사람이 살던 집들을 헐고, 논과 밭 그리고 산들을 깎아서 아파트를 짓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신도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개발된 그런 곳에서 내가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생각해보니 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파트 생활을 이어온 거 같다. 부모님이 주거 공간으로 선택했던 아파트라는 공간이 익숙해서 나도 자연스럽게 선택한 거다. 국토개발부의 ‘주거 실태 조사’에 의하면 2018년 대한민국에 아파트가 약 50%, 단독주택이 약 33%, 연립주택과 다세대 주택이 약 12%라고 한다. 주택 이외의 거처도 5%에 달한다고.   

  

그 50% 안에 속했던 나는 “주거 공간은 역시 아파트야”라는 아파트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서 살아왔던 거 같다. 그만큼 서울에서 가까운 신도시 아파트에서 사는 삶은 편안했다.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 pixabay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파트에서 사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뒤섞여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거다. 그때부터 안 보이던 게 보이고, 안 들리던 게 들렸다. 편리한 일상으로 생각했던 게 점점 불만으로 다가오는 거였다.      


처음엔 사람 사는 정으로 생각했던 이웃의 시선과 관심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이웃 간 단절된 삶을 극대화한다고 하지만 같은 공간에 살면서 시설을 공유하다 보면 낯이 익게 마련이다.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누게도 되고. 거기까지는 함께 사는 이웃이 나누는 따뜻한 온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같은 층 복도 양 끝 집들은 모두 화분을 내놓고 키운다. 그 집 사람들은 아침마다 복도에 나와서 화분 관리를 했다. 그들은 또 출근하는 사람들과 안부를 일상처럼 나누기도 했다. 나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들에게 인사를 하곤 했고.   

  

그들은 복도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아파트 화단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내가 어쩌다 늦게 나가거나 일찍 들어와도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도 “오늘은 왜 늦게 나가우?”라거나 “일찍 들어오셨네. 어디 아프신가?”라며 내 개인사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부담스러운 관심은 어느 순간부터 참견 혹은 감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집 개가 요즘 없는 거 같은데 어디 보냈수?” 2년 전 어느 아침에 들은 안부였다. 16년을 함께 산 우리 집 개는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치료도 소용없이 온몸에 종양을 달고 거의 1년을 엎드려만 지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개가 죽기 얼마 전 이웃들은 우리 집에 몰려와서 항의했다. 우리 가족이 공동 주택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지 못한 탓이었다. 죽어가던 우리 개에게서 심한 냄새가 났지만, 우리는 그 악취가 다른 집에까지 흘러갈 줄은 몰랐던 거다.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열거나 현관을 열면 개에서 나는 악취가 다른 집에까지 풍겨 갔다고. 당연히 이웃들이 큰소리를 낼 수밖에.      


우리 가족은 이웃들에게 너무나 미안했고 창피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피해를 주고 있었던 거다. 개가 죽은 후 우리 가족은 집을 깨끗이 청소했다. 혹시나 남아있을 냄새를 없애려고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그런 얼마 후 출근길에 이웃들이 죽은 개의 안부를 물어온 것.     


바로 며칠 전에는 인상을 쓰며 화내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개의 안부가 진짜로 궁금했던 거였을까. 그들은 그 후로도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난 우리 현관을 두드리며, 화내며, 소리치던 얼굴만 떠올랐다. 분명 우리 가족이 분명 잘못한 거였지만, 이웃의 두 얼굴만 크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졌다. 식사 때면 다른 집에서 요리하는 냄새가 불쾌하게 흘러들어왔고, 주말이면 찾아오는 옆집 손주들이 뛰어노는 소리도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물어오는 안부가 간섭으로도 느껴졌다.      


동네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카드 내면 눈치 주는 빵집의 빵은 맛없었고 유통기한이 반나절 남은 우유를 파는 구멍가게의 물건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단골이라고 반기는 얼굴에서 장삿속이 보이는 거였다. 한마디로 그 동네에 정이 떠나 버린 거다.     


정확히는 10년 가까이 산 그 아파트 단지에 정이 싹 떨어졌다. 그게 약 2년 전이었다. 그때부터 아내와 난 이사를 고민하며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 고민과 대화 끝에 지난여름 즈음 아파트를 떠나 보자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 부부에게는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우리는 분당 근교의 전원주택을 알아봤지만, 비용과 교통문제로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했다. 대신 마당처럼 꾸밀 수 있는 옥상을 가진 공동 주택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우선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옥상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주로 아파트를 위한 자료였다. 아파트가 50%에 육박한다지만, 나머지 50%를 위한 자료는 불친절했다.  

 

이사한 집에서 바라본 분당의 아파트 ⓒ 강대호


발품 끝에, 지난 9월 첫 주 우리 부부는 분당 어느 산 아래 옥상집으로 이사했다. 비록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40년 넘는 아파트 생활에서 얻지 못한 경험을 맛보고 있다.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새로운 맛을 계속 경험할 듯해서 난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앞으로 이 글은 아파트가 아닌 곳에 사는 주거 문화를 다룰 것이고, 아파트에서와 달라진 생활의 모습도 다룰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이사 간 옥상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도 기록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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