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의 은총으로>
영화는 알렉상드르가 리옹 교구와 나눈 서신으로 보이는 그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알렉상드르는 겉보기에는 평범하며,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둔 예쁜 가정을 꾸린 사람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유년시절에 교회의 신부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독실한 신자이며, 그의 큰 아들들도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가 과거의 경험을 꺼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또 다른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지 않길 바라며 심리학자를 만난다.
교회에서 주선해준 심리학자는 그를 신부와 만나게끔 일을 끌어간다. 바로 알렉상드르를 성적으로 학대했던 신부인 프레나 신부와 만나게 한 것이다. 그렇게 만난 프레나 신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알렉상드르의 말이 모두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와 같은 일 때문에 부모들에게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심리학자와 신부, 알렉상드르는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 잡힌 손끝에서 느껴지는 알렉상드르의 거부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렉상드르는 이 만남 이후 어떤 식이든 진전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했다. 그 기대처럼 추기경과 만나기로 기약하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만남도 질질 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만남을 가진 후에도 사건을 질질 끌기만 하는 듯했다.
그를 참지 못한 알렉상드르는 교회 안을 넘어서, 프레나 신부를 고소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그에게는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의 결심은 새로운 피해자인 프랑수아를 찾아내는 성과를 가져온다.
프랑수아는 그저 순진한 아이였다. 프레나 신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 '신부님이 나를 좋아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이 부분에서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의 피해자들이 생각났다. 본인의 위치를 이용해 아이들을 성적 학대를 했지만, 아이들은 그저 자신이 선택받았다 느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프랑수아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이 사건에 얽히기를 꺼린다. 하지만 교회에서 과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프레나 신부를 여전히 아이들 가까이에 둔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그렇게 피해자 진술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면서 의사인 또 다른 피해자를 만나면서, 피해자들의 연대 모임인 'La Parole Liberée(라 파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를 결성한다.
연대 모임을 결성하면서 어느 정도의 파급력이 생기고, 수많은 피해자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기자회견 등 여러 활동을 통해 만난 에마뉘엘도 피해자 진술을 하고자 마음먹는다.
에마뉘엘은 과거의 사건 때문에 트라우마에 갇혀 살며, 강한 외면과는 달리 착한 마음을 가졌다. 그런 그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을 할 때 가슴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 점에서나, 당연히 더 있을 거라 생각한 듯한 모습에서나.
그렇게 그들의 여정은 꽤나 순조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재판 연기 등으로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과연 어떤 끝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법이 정의의 편이길 바랄 뿐이다.
누구를 위한 공소시효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스치던 생각이었다. 누구를 위한 공소시효인가. 범죄에 대하여 형벌권을 소멸시킨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 공소시효 때문에 미제 사건으로 남은 사건이 여럿이니까.
여러 이유에 근거하여 생긴 제도겠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피해자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범죄에 공소시효가 없다. 영원히 따라다닐 그림자이며, 악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공소시효 때문에 고소를 할 수 없는 알렉상드르를 보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해결할 수 없음이 가져오는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영화 마지막에 법이 개정되어 미성년자 성적 학대 공소시효가, 피해자가 성인이 된 후 20~30년이 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피해자의 아픔을 없애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정말로 소아성애자가 맞을까?
왜 이런 의문을 가지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소아성애자에 대해 찾아보면서 가진 질문이다. 미국정신의학협회가 펴낸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을 보면, 이러한 경향이 있다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고 주관적인 고통이나 불편을 느끼지도 않으면 소아성애자로 진단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프레나 신부는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춘기 이전의 아이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소아성애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런 점을 깔아놓고 보면 프레나 신부는 분명 소아성애자라고 불릴 만하다.
하지만 과거의 프레나 신부를 본다면 과연 소아성애자가 맞을까 싶어 진다. 고통이나 불편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에 와서 그는 "미안하지만, 그건 병이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마치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정말 병적으로 병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하는 변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과거에 이미 자신이 한 행동을 덮어준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무마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내뱉는 발악처럼 보였다.
여전히 프레나 신부가 정말로 소아성애자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있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소아성애자가 맞을 것이라 생각하려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