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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만산 Jun 23. 2022

아동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착각에 대해서

강제적 셧다운제' 폐지에 대한 고찰

 

  2014년 헌법재판소에서는 아동과 관련한 두 가지 판결이 내려졌다. 첫 번째는 19세 미만의 사람의 선거권과 정당 설립 및 가입의 권리에 대한 제한을 합헌 선고한 사건이며, 두 번째는 16세 미만의 사람에게 오전 0시부터 6시까지의 인터넷 게임을 금지한 청소년 보호법(이하 ‘강제적 셧다운제’)에 대한 합헌 선고이다.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두 판결은 사실 ‘미성숙한 아동’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도출된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판결이다. 이 두 판결이 함의하는 주요한 논리를 살펴보자면, 우선 아동 자신의 기본권 행사가 오히려 본인의 이익에 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보호 논리’, 두 번째로는 이러한 제한이 분명 기본권에 대한 박탈임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성인이 되면) 해소되기에 박탈까지는 아니라고 하는 ‘유예 논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판단의 기저에는 ‘아동은 미성숙하다’라는 너무나 확실하고 절대적으로 보이는 명제가 존재한다.




  그들은 분명 충동적이다. 현재의 일시적인 욕구가 마치 일생의 욕구인양 거침없이 탐닉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기본권을 온전히 누린다면 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까지 훼손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며 언젠가는 후회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충동적이고 어리석은 그들이 다다를 미래를 알고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인인 우리가 이미 아동기를 지나온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 아동기를 겪은 우리는 그들의 철없는 삶이 지향하는 가치들이 매우 일시적이고, 성인인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에 비해 너무나 작은 것들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들의 삶이 의미를 부여하는 내용들은 정말 사소할 따름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기본권을 아주 잠시 동안만 맡아놓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오히려 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혹시 만약에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아동을 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이러한 만약의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필자는 한 가지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루소(J. Rousseau)의 『에밀』이 전해주는 아동기에 대한 통찰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어린이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그 그릇된 생각에 기초하여 고찰하면 고찰할수록 그들은 더 과오만 저지른다. 아주 현명한 사람들조차 어른이 긴히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어린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전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 어린이가 어른이 된 후의 문제만을 항상 생각한다.(54) … 우리는 아이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같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추론의 기술이 되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보는 기술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에게 우리의 방법을 가르치려는 대신 우리가 그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에밀』, 이환 옮김, 돋을새김, 2015, 259쪽)



 루소의 서술에는 많은 함의가 숨어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이번 논의와 관련하여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은 바로 아동과 성인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 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명제는 그들의 발달 정도가 성인보다 월등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향유하는 세계가 성인의 세계와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아동은 성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뻐하고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아동을 대신하여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전제에 아주 약간의 의심이 피어난다.



  아, 그럼에도 우리에겐 아직 이 의심을 부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험적 근거가 존재한다. 바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이미 아동기를 경험한 그들에 앞선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들의 미래이다. 그런 우리가 느끼는 아동기 욕구의 헛됨이 어찌 근거로서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인식은 이미 아동기를 겪은 우리의 가치판단이 아동보다 우월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따라 정당화되지만 이 과정에도 사실 약간의 오류 가능성이 존재한다. 바로 이미 성인 집단에 합류한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가치판단이 더 이상 아동 집단을 고려하기에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동이 성인으로 변화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해당 사회가 갖는 일반적 상식에 맞춰 가치판단 기준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은 ‘교육’ 혹은 ‘재사회화’로 명명되는데,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모습들 중 많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은 결국 우리의 자아실현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강제성을 띤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동 집단에서는 긍정되었던 삶의 방식들이 기존 성인 집단에 의해 전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성인기로 진입하는 아동은 본래 그들이 갖던 가치판단의 기준과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때문에 성장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아동은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자기 수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아동이었던 성인에게 아동기의 욕구는 더 이상 유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아동의 삶의 방식에 대해 ‘철없음’으로 치부하며 아동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더해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앞선 가능성들이 사실이라면 우리 성인은 아동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존재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모든 것을 우리 입장에서 결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월권일 것이다. 오히려 아동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우리의 입장이 아닌 그들의 입장으로 온전히 하강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때, 우리 사회가 갖게 될 일반적인 삶의 방식에도 일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은 ‘철없음’으로 치부되는 일부 모습들 역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서 사회에 포용될지 모른다. 더 많은 집단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강제적 셧다운제’는 결국 2022년이 된 올해부터 폐지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동들은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있으며 심지어는 컴퓨터를 넘어 스마트폰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왔다. 그렇다면 오히려 ‘강제적 셧다운제’가 확대되어 ‘스마트폰 셧다운제’로 진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폐지’라는 일견 모순적인 결론에 이른 것은 당시 아동이었던 자들이 성인이 되고서 게임에 대한 인식 전반이 완화된 까닭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강제적 셧다운제’의 폐지는 우리 성인의 월권행위가 얼마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하는가를 보이는 현실적 증거일지 모른다.



*  본 글은 필자가 '실천교육교사모임'에 연재 중인 글을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참고>


김지혜, “미성숙 전제와 청소년의 기본권 제한”, 한국공법학회, 공법연구 23.1, 2014.


장 자크 루소, 『에밀』, 이환 옮김, 돋을새김, 2015.


KBS뉴스, “‘게임 셧다운제’ 10년 만의 폐지…내년 1월 1일 적용”,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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