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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만산 Aug 24. 2022

'우영우'는 잘못이 없다

미디어 속 교사에 대한 불편한 묘사들

 



0. 실재했던 체벌의 모습들


  얼굴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에 정신이 든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교실이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지만 바로 위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선생님의 눈빛을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교실 속 모두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까는 등 온 힘을 다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몇 초간의 정적 후에 선생님은 코웃음을 치시더니 다시 한 번 강하게 내 뺨을 날렸다. 고개가 휙 돌아가며 머리가 띵하다. 그 후 선생님은 교탁으로 돌아가셨고, 'xx 3월달부터 내 수업에 조는 x끼는 처음 보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몇 주동안 내내 선생님의 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위는 지금도 잊을만 하면 동창회 자리에서 좋은(?) 안주거리가 되곤하는 필자의 경험담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필자는 꽤 많이 맞아본 것 같다. '엎드려서/교탁 위에서/신발장 위'에서 '허벅지/얼굴/손톱/발바닥/심지어는 말하기 민망한 부분'까지 다양한 신체부위에서 어떤 통증이 느껴지는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많은 교사들이 과거 그러했듯 필자도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당연하게도 필자가 받은 체벌 사유 중 단 한 건도 비도덕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은 없었다. 대부분 성적, 연대책임, 지시불이행 등의 이유였다.


그랬다. 옛날에는 다 그랬었다…


아, 참고로 필자가 학교를 졸업한 건 2013년이다.






 1. 창작물 속 직업들과 권력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화제이다.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매우 섬세하게 다루어 재미와 공익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며 큰 호평을 받고 있다. 필자를 포함한 주변 동료들도 우영우를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아마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집중하고 있는 듯 하다. '우영우에 드러나는 교사 인식'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4회에서의 한 장면에 집중하고 있다. 해당 회차에는 우영우가 같은 반 급우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은 과거가 등장하는데, 그중 교사로부터 뺨을 맞는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교사들은 지금의 시대적 상황 아래 교사가 학생(그것도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비판하고 있다. 드라마가 여러 법조인 및 자폐 스펙트럼 관련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서 교사들의 속상함은 더욱 커져갔다.


 분명한 것은 학교 현장에서 체벌은 2010년대에 들어서며 초등교육법의 보완과 학생인권조례 등의 발표를 시작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22년 현재 학교 속 체벌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속 시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드라마 속 우영우 캐릭터는 27세로 1996년생이다.(만 나이라면 95년생) 따라서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던 시기는 2012년에서 2014년으로 추정된다. 해당 시기는 전국적으로 체벌이 사라져가는 과도기에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학교에 따라 분명 다르겠으나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는 체벌이 있는 학교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교사인 우리 입장에서는 체벌을 상상할 수도 없는 2022년 지금에 와서, 비록 과거 회상일지라도 현실과는 전혀 다른 학교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무언가 답답하다. 현실과 다른 묘사를 통해 교사에 대한 편견을 줄 수 있지 않은가?


 

 모든 대중 창작물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가기 위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외적 갈등, 그 중에서도 '인물과 사회의 갈등'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이는 주인공이 항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을 설정하여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때문에 설사 작품이 '인물 간의 갈등'을 다룬다 할지라도 주인공의 대항자로서 '일반 시민인 개인'보다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물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이들은 주인공이 속한 시스템에서 특정 권력이나 관습을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단순 개인 대 개인의 갈등이 아닌 주인공과 사회와의 갈등으로 문제를 확대시킨다.


 이렇게 권력이나 관습을 대표하는 대항자로는 '전통적 관습을 대표하는 시어머니', '관료제를 대표하는 권위주의적 관리자', '강한 법치주의를 대표하는 맹목적인 공무원' 등 많은 유형이 있겠지만, 유달리 자주 보이는 직업군을 특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찰', '기업가', '검사', '정치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사회가 강한 '권력'을 부여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권력이란 '남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공인된 권리나 힘'을 말한다. 이때 권력이 '공인'된 것인 까닭은 그것이 사회구조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하는 목적으로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물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항자는 단순히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 권력을 부당하게 휘두르는 존재여야 한다. 때문에 경찰은 '무능하거나/ 혹은 공권력을 지닌 건달', 검사는 '대기업과 정치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앞잡이', 판사는 '재판 거래자', 재벌 총수는 '정부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최종보스'로 묘사되는 작품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권력을 지닌 직업에 대한 비판은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언론에 부패한 검사나 경찰이 나올 때면 '현실판 부당거래', 부패한 정치인이 나올 때는 '현실판 내부자들'이라 불리며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작물들은 일부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단순 현실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려내어 어떤 권력에 대한 우리 상상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그 권력을 더 비판하고 경계할 수 있게된다.

 작년, 화제가 된 드라마 중 'D.P.'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은 군대 속 악폐습을 주제로 하여 군대 조직이라는 구조적 권력과 주인공의 대립을 주요한 갈등으로 다루고 있는데,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구타와 괴롭힘 장면은 매우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묘사되는 장면들은 지금의 군대 모습과 괴리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극중 배경으로 설명되는 2014년의 일반적인 군대 모습과도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군대라는 집단은 강한 폐쇄성과 상명하복의 원칙으로 인해 권력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은연중에 창작물이 갖는 권력에 대한 경계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교사도 욕먹어야 된다고?
장난치나, 교사한테 무슨 권력이 있다고!


 벌써 필자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도 앞서 말한 강한 권력들 사이에 '교사'를 포함시키는 건 조금 민망하다. 인정한다. 분명 현재의 교사가 갖는 모습들은 권력을 지닌 직업으로 바라보기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극심한 민원에 상처 받는 교사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어쩌면 지금 필자의 주장은 아픈 교사들의 상처에 소금을 치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사가 교실 속에서 권력을 가지며, 또 '가져야만' 하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비록 이것이 교실에만 국한되는 제한적인 힘일지라도, 어른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교사라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같이 체벌을 행할 수 있거나 교사가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동을 가르치는 성인인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영향력으로서의 권력이다.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갖지 못한 교사라면 교실 속에서 요구되는 교육활동을 실행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위적으로는 교사가 권력을 잘못 향유하는 여러 매체 속 묘사는 권력을 지닌 여타 직업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갖는 직업적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 교사가 현실과 완전히 괴리되어 말도 안되게 묘사되어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참아야만 할까? 표현의 자유라며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2. '섹시한' 간호사와 '폭력적인' 교사


하나의 반례가 있다.


 2020년 한 k-pop 걸그룹이 공개한 뮤직비디오가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영상 속 가수는 몸에 딱 붙는 짧은 치마와 빨간 하이힐을 신고 나와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실제 우리 현실 속에서 간호사는 의료 행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통 넓은 바지와 편한 신발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에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현실과 동떨어졌으며 간호사에 대한 편견을 성적 코드로 답습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창작물에 대한 지나친 검열이라며 재반박하기도 했지만 결국 해당 소속사는 사과문과 함께 해당 장면을 삭제했다.      


  여기서 교사들은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다. 간호사와 교사의 사례 모두 현실과는 다른 묘사가 문제인 것인데 왜 간호사에 대한 묘사는 유독 문제가 된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넓은 의미에서의 '혐오'. 즉, '대상화'에서 찾고자 한다. 필자는 대상화를 '주체(생각하는 사람)의 표상체계(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존재가 자신의 행위와 무관하게 규정되고 소비되는 것'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유식해보이고 싶어 이상한 말을 잔뜩 늘어놓았지만, 짧게 말해서 어떤 사람들이 누군가를 제 멋대로 상상하여 딱! 정해버리는 것이다.


 

 이때 문제는 그 사람들이 다수이거나 힘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 허무맹랑한 상상은 자연스레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마치 진실인양 계속 회자된다. 교실 속 인기있고 힘이 센 아이의 말이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대상화'하는 개념을 통해 간호사의 사례는 간호사의 행동과 전혀 무관하게 간호사들이 성적 매력을 갖는 직업으로 규정되어 소비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우영우 속 폭력적인 교사의 묘사는 다르다. 이는 교사에 대한 편견을 형성해 그들을 피권력자나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가진 존재로서 그들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앞선 사례는 대중으로 하여금 간호사를 성적인 대상으로서 상상하여 그들을 소비하도록 이끌지만, 후자는 오히려 과도한 권력을 가진 존재로 상상하게 하여 그들을 경계할 수 있게 한다. 전자는 다수에 의한 소비재로, 후자는 다수의 위에 선 권력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위계적인 차이가 있다. 분명 둘 모두가 편견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방법적인 공통점이 있을지 몰라도 각각의 집단을 어떤 존재로 만들며,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상상을 전개시킨다. 간호사의 사례는 대중이 현실과 다른 그 상상을 긍정하게 한다. 물론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은 '섹시한 간호사'가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나 '소비하는 대중'은 그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사실은 아닐지라도 대상화된 간호사를 긍정하고 수용한다. 이와 반대로 '폭력적인 교사'는 창작물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악역으로 소비된다. 따라서 대중은 폭력적인 교사를 비판하고 그것이 존재하는 현실을 거부하게 된다. 전자는 상상의 현실화를 바라지만, 후자는 상상의 현실화를 거부한다. 이 점에서 우리 교사가 정말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대중이 바라도록 심어주는 창작물일 것이다. 가령 폭력을 통한 행동 변화를 참교육이라며 미화하거나, 교사라는 직업이 갖는 가치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행하는 경우들 말이다.


 




  3. 결론


 그럼 이제 번드르르한 주장은 그만하고 현실로 돌아와보자. 필자도 교사다. 어떤 영향력 있는 창작물이 과도한 편견을 조장해 교사 전체에 대한 비난 여론을 만든다면 필자 역시 한 명의 교사로서 의욕이 떨어진다.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분명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우영우 사건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속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극중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주인공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어느날 그는 학교 급우들이 건낸 쪽지를 수업 중에 그대로 읽는데 그 속에는 교사의 외모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다. 이를 공개적으로 들은 교사는 수치심에 당황하더니 주인공의 뺨을 때리고 교실을 박차고 나간다. 그러자 주인공은 영문을 모른채 당황하고, 아이들은 꺌꺌대며 웃는다.



  우선 드러난 사실만 보자면,


 1. 주인공은 교사에게 모욕을 주었다.
 2. 교사는 주인공의 뺨을 때렸다.
 3. 1번은 다른 아이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속인 결과다.
→ 따라서, 섣부르게 주인공을 때린 교사는 나쁘다.

  교사가 우려하는 것은 시청자들이 위의 추론과정에 따라 생각하게 되어 교사 일반에 대한 오해를 가질까 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집중해서 시청한 사람들은 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가적으로 발견한다.

1. 해당 상황 속 교사는 정식 교사가 아닌 '교생'이다.
2.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교사를 조롱한 후, 학생들은 이에 동조하듯 웃는다.  
3. 교사는 당황했고, 주인공을 때린 후 교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세부적 사실까지 고려했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다시 추론할 수 있다.


1. 교사는 대학생으로 교사로서는 미성숙한 존재이다.
2. 학생들에 대해 파악이 안 된 교사는 주인공의 장애를 인지하지 못했다.
3. 학생들이 '권위를 잃은 교사'를 공개적으로 괴롭히고 있다.
4. 미성숙한 교사는 강한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점들을 고려해보면 해당 장면 속 교사는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가 아닌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해당 장면은 정말로 권력을 가진 교사가 그것을 부당하게 휘두르는 모습이었는가? 필자가 느끼는 바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작금의 교사들이 이러한 이슈에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필자는 그 원인 역시 우영우가 묘사한 교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의 폭력에 어떠한 보호 없이 노출된 교사
교육을 포기하고 교실을 떠나버린 교사


 

 그것이 바로 우영우가 묘사하고 있는 교사의 모습이다. 바로 권위를 잃은 교사의 모습이다.

결국 문제는 '잘못된 권위를 묘사하고 있는 창작물'이 아니라, '합당한 권위를 갖지 못한 교사의 현실'이다.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에서 연재중인 필자의 글을 브런치에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참고자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10282070919114

https://www.segye.com/newsView/20220622514633?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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