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입만산 Aug 24. 2022

땀 흘리는 철수, 불편한 영희

방관하며 기여하는 자들에게

1. 땀 흘리는 철수
철수는 분명 뭔가 일을 더 하는 것 같다. 이는 공식적인 업무를 말하는 것이 아닌 여러 가지 잡무를 고려했을 때의 결론이다. 행사 준비를 위해 무거운 사물들을 옮기거나, 눈이나 배수로 등을 치우기 위해 모여 달라는 메신저 쪽지의 수신자가 철수를 비롯한 일부 교사들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딱히 비밀도 아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나가는 철수는 정상이다. 약간이라도 불만을 표현한다면 철수는 옹졸한 MZ세대다. 여전히 많은 선배 선생님들은 어떤 잡무들에 대해서는 철수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깊게 박여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들에 귀 기울여 보자면 우선 완력이 필요하거나 수고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이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러한 이유를 들은 철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를 들어보니 이 일들이 일회적이며 소규모의 인원만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교사에게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눈을 치우는 등의 일들이 얼마나 자주 있겠느냐? 더군다나 절대적으로 양이 많아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결코 아니고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니까... 그러니까 예측하지 못한 사태에 대해 소수의 인원으로 잠깐 해결하면 끝나는 일이기에 철수들만 도와주면 매우 쉽게 해결되는 일인 것이다. 열띤 설명에도 철수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딱히 일이 힘들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이 과정 자체를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서 모두가 함께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2. 불편한 영희
 철수와 몇몇 선생님들이 육체적인 잡무를 더 하는 것은 영희도 알고 있다. 무슨 일을 하고 오는 건지는 모르지만 간혹 목장갑을 벗으며 계단을 오르는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올라온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 그런데 애초에 그분들이 모두가 함께 했어야 하는 일들을 대신해서 하고 온 상황이 맞긴 한 건가?
 영희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온 건지 알지도 못한다. 쪽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 속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만 피어오른다. 한 번은 영희도 밖에서 풀을 뽑는 철수들을 발견하고는 용기 내어 달려간 적이 있었다. 마음만으로도 고맙다는 부장님의 말씀을 뿌리치고서 영희는 힘껏 도왔다. 요즘 친구들 답지 않게 싹싹하다며 거듭 칭찬하는 교무부장님의 말씀은 멋쩍으면서도 흐뭇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영희는 우연히 창 밖에서 일하는 철수들을 발견하곤 한다. 영희는 더 이상 용기 낼 수 없았다. 두 번째의 용기는 오히려 영희를 별난 사람으로 만들 것만 같았다


 


   지난 겨울 폭설이 온 어느 날, 필자는 공무원들이 비상근무를 해가며 눈을 치우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를 살피며 내려가다 댓글창에 눈이 다다랐을 때 이런 댓글들을 보았다.


“어차피 남자 공무원들만 죽어나겠지.”


그 아래에는 미약하게나마 항변하는 대댓글이 달렸지만, 곧 댓글창은 철수들의 생생한 경험담이 섞인 더 큰 목소리들로 뒤덮여 버렸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남성들이 갖는 불만은 더 이상 온라인 속에만 존재하는 울림이 아니다. 최근 대선 과정에서도 주목받은 ‘이대남’이라는 집단의 단합된 목소리는 그들이 자라며 습득한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과 실제 사회 사이의 어떤 괴리가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목소리로 결집된다는 것은 언제나 다른 어느 집단에 대한 불만을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중 상당 부분은 여성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지금의 구조를 형성한 기성세대가 아닌 비슷한 시대적 경험을 습득하며 함께 성장한 동 세대의 그들에게 말이다.    


 보다 면밀히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자면 필자가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경우의 수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분명 그 기저에는 남성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할 것이다. 변화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갖는 권리와 책임 사이의 어떤 불균형에 대한 인식이 말이다. 필자 역시 그들과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에 공감하는 부분은 있다. 그러나 그 반발의 대상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해 필자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종종 ‘내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속한 구조에 얽매여있다. 내가 자란 환경은 내 가치관을 결정하고, 여기서 형성된 내 특성들은 남들에게 보이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행동을 규율화한다. 이러한 구조적 토대는 얕게는 주변인들과 함께할 때 사용되는 내 '이미지' 일 수 있고, 깊게는 내게 속하는 다양한 특성들이 형성되는 구조적 한계 그 자체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없는 것처럼 이 한계는 내게 주어지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경계이며 전부이다.


 다시 앞서 2번 사례로 돌아가자면 영희는 결국 그녀가 처한 구조적 한계에서 탈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희에 대한 이미지는 곧 그녀 스스로가 그녀에게 가하는 규율로 연장될 것이며, 그녀가 속한 내집단과 ‘다른’ 행동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를  별난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이 실행은 거대한 용기를 요구한다. 이는 내집단 내에서의 배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엄밀히 밝히자면, 필자는 우리 사회에 여성차별이 존재함을 확신한다. 이는 남녀를 가르는 수많은 구별 속에 사회적으로 실재하고 있다. 때때로 그것은 혜택이나 배려와도 같은 모습을 띠고 있지만 결국 여성 자신이 원하지 않은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필자는 여성이 갖는 선택지가 남성이 갖는 그것보다 적다는 점에서 그들의 차별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 차별은 역설적이게도 남성의 선택 역시 옥죄어 오고 있다. 이 고착화된 구조는 남자와 여자 둘 모두를 원치 않는 프레임 속으로 밀어 넣으며 우리를 끼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촘촘하게 짜인 구조 속에서 단지 적응할 뿐이다. 구조를 비판할 순 있지만 구조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갈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엉뚱하게도 이 갈등에서 한 발 떨어진 기성세대에게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구조를 직접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 사회에 적응하며 자연스레 익힌 방식들 중에는 그때는 옳았으나 지금은 그른 경우들이 종종 있다. 상당수는 이미 쇠퇴하여 사라졌으나 여전히 많은 부분들은 ‘차별이 아닌 차이의 존중’이라고 이름만 바꾼 채 우리 사회의 구조로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 역시 차이에 따른 존중의 존재는 동의한다. 가령 ‘생리휴가’나 성별 쿼터제의 경우는 신체적 특성이나 사회적 형평을 맞춰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점은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성별에 따른 역할을 꼬집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그들의 방관 아닌 방관을 추궁하는 바이다. 학교가 차별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때는 그들이 ‘차별이 아닌 차이’라고 외치는 단순한 정당화를 뿌리치고, 남녀를 나누는 과거의 특성들을 부수고서부터일 것이다. 자, 그럼 내일은 쪽지를 모든 선생님에게 전송하는 변덕을 부려보자. 작은 변덕이 많은 것을 바꿀 것이라 확신한다.


 


p.s.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에 연재 중인 필자의 글을 브런치에 동시에 포스팅하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우영우'는 잘못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