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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환 예비작가 Dec 08. 2023

삶의 계절

지난 것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시작은 무엇으로부터 선택하고 시작하는 삶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유일한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하지 못하고 시작한 그날은, 지금 나에게 모든 것의 출발선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내 주변의 강요 아니면 내가 있는 곳의 환경과 분위기에 놓여진 사항을 나는 선택하며, 처음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그날부터, 난 선택이라는 것을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며 성장해야 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그날에 난 봄날이었다.


잘 가꾸어진 환경에 태어나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며, 작고 연약한 내가 단단해지기 위해 많은 관심과 보호 속에서 세상에 나와 시작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그날이 언젠간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편안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날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이제 세상을 향해 울음을 시작한 나에게, 봄날은 그리 따뜻하지 못했다.

가끔은 찬 바람이 불어오듯 아픔과 두려움으로 모든 것이 처음인 나에게 수많은 용기와 반복이 필요했다.

그 순간부터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닌 나의 선택과 용기 그리고 반복이라는 선택 속에 모든 걸 시작하며 완성해 내고 있었다.

씨앗이 뿌려지고 그렇게 봄날의 새싹이 피어나듯, 난 그렇게 조금씩 봄날의 새싹처럼 조금씩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 나의 선택으로 모든 걸 시작했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것이 낯설고 나약한 존재였지만, 나는 그 누군가의 도움과 보호 속에서 내가 처음 하는 선택과 반복에서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게 그들이 나의 햇살이 되어 주었다.

그 봄날에 난 무슨 고민이 있었을까?

참 어려운 질문 일수 있다.

그 어린 봄날의 새싹 같은 내가 경험이란 것도 없이 삶의 목표와 목적이 없이 오직 생명력을 유지하는 본능적인 삶을 시작했는데 고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시작한 봄날의 씨앗은 새싹으로 자라는 순간까지,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나와 다른 환경의 씨앗들이 새싹으로 각자가 다르게 피어난다.

좀 더 빠르게 피어나는 새싹이 있지만, 조금은 늦은 새싹도 있다.

그 모든 새싹이 소중한 존재이다.


지금 내가 그들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새싹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이 되는지 보다는, 봄날의 푸릇한 새싹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존재이다.

그런 봄날에 난 푸릇한 새싹이 되어, 하루가 다르게 나를 성장시켰다.


봄날이 지나 내 삶에 여름이 찾아왔다.


봄날의 여린 새싹이 어느덧 성장이라는 과정을 지나, 단단하고 풍성하게 자라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름은 봄날과 달랐다.

따뜻한 햇살이 아닌 뜨거운 햇살이 강렬하게 나를 비추는 여름이었다.

이젠 난 나를 보호해 주는 존재로부터 봄날의 새싹과는 다른 보호와 관심을 받게 된다.

가끔은 그 존재에게 난 반항을 했고, 그 존재들과 단절하기 위한 시간의 순간들이 있었고, 그들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으로 나를 가두며 그 존재에게서 오는 관심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건 무엇인지 나는 그때 몰랐다.

그저 그 존재들의 관심과 간섭이 싫었다.

그런 날들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그들과 대화는 줄었다.

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나를 가두던 공간을 벗어나, 친구들을 만날 때 자유로움을 느꼈다.

친구들은 나에게 강요와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에 그 순간에 하고 싶은 모든 걸 즐기는 듯 시간을 보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내가 무엇이 되든 그런 것에 관심도 없이 그저 이들과 있을 때는 난 자유로움에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는 더욱 성장하며 커질수록 그들의 강요와 관심이 더 높아졌고, 내 앞으로의 삶에 대한 나의 선택이 아닌 그들의 요구와 강요로 인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아졌다.

그들의 강요와 요구로 좁아진 선택의 범위에서, 나의 즐거웠던 친구들과 해방감이 아닌 성장을 위한 삶의 목표와 앞으로 나아가야 될 방향에 대한 우린 말없이 각자가 선택을 해야 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봄날의 그날과 다르게 이제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들에 있어서 나의 온전한 선택이 아닌 날 지켜주던 그들의 강요 같은 관심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주고, 그 정해진 범위에서 나는 선택하며 살아가야 했다.

이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며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끼던 친구들은 같이 웃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이제 웃는 것도,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뛰어다니던 그런 시간이 그들의 요구들 속에서 내가 선택한 지금은, 그 시간이 더 이상 나에게 오지 않을 시간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난 그때의 시간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그들의 요구로 선택된 지금을 살아간다.

그 요구로 선택한 지금의 결과가 앞으로 내가 만나야 할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지금 선택된 사항에 충실하게 노력했다.

다시 찾아올 여름에 친구들과 땀 흘리며, 뛰어놀던 그 시간을 그리워하며, 내게 선택된 지금에 충실했다.

그렇게, 지금의 충실한 내 삶이 그들에게 강요받던 간섭과 요구에 충족하기 위해 내 여름은 너무 힘들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기다리고 그리던 친구들과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 흘리던 그 시간들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어쩌면, 내 기억 속에서 그날의 친구들과 뜨거웠던 여름은 조금씩 잊어져버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추억이라 말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고, 그 친구들과 가끔 만날 때면 땀 흘리던 그날이 그립다는 말에 추억으로 잠시 젖어든다.

추억이라는 말속에 우린 각자가 선택한 길을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모르고,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친구들 중에서 강요와 요구에 수긍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친구도 있었다.

나에게 강요와 요구를 하던 존재들은 그런 친구의 선택이 무책임하게 반항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순전히 자신의 기준에서 우리를 판단했다.

아직은 모른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우린 아직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 요구와 강요를 하던 존재들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말만 한다.

그들의 경험과 기준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름이 그러하든 무더움 속에서 갈증을 해소하듯이 시원한 비가 내린다.

뜨거운 햇살에 목마름을 느끼던 그 순간에 나에게 다시 찾아온 자유로움이 그러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강요와 요구로 숨 막히듯 뜨거운 여름에 열심히 달려와 종착역에 도착하면, 이제는 그들의 강요와 요구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난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

무더움 속에 갈증을 해소해 주던 시원한 비는 새로운 무더움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휴식 같은 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강요하고 요구하던 그들이 더 이상 나에게 그러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되며, 그 선택과 결정에 모든 책임을 이제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젠 그 존재는 묵묵히 나를 지켜보는 존재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더운 여름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은 내 몸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내 성장에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전지 작업을 해주셨던 것 같다.


내가 봄의 새싹으로 피어나고 늦봄 어쩌면 초여름에 무더운 햇살에 성장하던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가지치기를 하고, 남아있는 가지를 다듬어 주고, 그렇게 자라는 가지를 고르며, 흐트러진 내 몸에 불안전한 내 앞 길에 나의 겉모양을 전지 작업하여 고르게 잘 자라서 어울리는 옷을 입고, 삶이라는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요구와 강요가 있었던걸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이 원하는 건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 어울리고, 사람들 속에서 그들보다 떨어지지 않도록 나의 늦은 봄에 아니면 초여름에 가지치기를 하셨던 거 같았다.

그렇게, 가지치기를 해서 내가 바르게 커 갈 수 있었고, 내가 흐트러지지 않게 성장할 수 있게 했고, 내가 어떤 것으로부터 병들지 않게 그리고 내 마음이 건강할 수 있게 그들은 말없이 나를 다듬어 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게 그들은 그랬다.

어느덧 여름의 중턱에 도착했을 때, 난 나의 삶의 터전을 만드는 과정을 시작했다.

그들이 잘 가꾸고 건강하게 보살펴 준 덕으로 나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그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나의 삶을 시작한다.

아직 나의 여름이 끝나지 않은 지금에 난 나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간다.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삶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고, 이후에 모든 일들은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럴수록 난 선택에 대한 결과보다 그 선택이라는 것에 대한 무게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새롭게 시작한 삶에서 나의 여름은 아직도 중턱을 지나고 있지만, 새로운 봄을 시작할 나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봄의 새싹으로 자라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처음인 봄을 시작하는 아이였다.

그런 봄을 시작하는 아이가 조금씩 봄의 끝자락에 이를 때, 나는 어느덧 여름의 지나 가을이 다가옴을 알게 된다.

내 나이가 40대가 되었을 때 돌아보니 지금까지 잘 살았고, 잘 살아왔다.

사회적으로도, 내가 가진 환경에서도, 난 어느 정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들보다 뒤처진 인생이 아닌 적정한 위치에 올라왔고, 이젠 내 삶의 초여름처럼 숨 가쁨은 없어지고 이전보다는 여유가 있을 때,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그 아이가 나를 이끌 듯 내가 가을을 시작할 수 있게 동력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나로 인해 새롭게 시작한 봄의 그 새싹 같은 아이로 인해 난 가을을 시작했다.


그들에 강요와 요구로 선택된 삶이 내가 봄을 이겨내고, 가지치기 그리고 가지 다듬기 마지막엔 가지 고르기로 내가 맞이할 가을에 풍성함을 안겨 줬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보낸 내 봄과 긴 여름이 지금에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나로 인해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그 아이로부터 알게 되었다.

내 초여름의 간섭과 강요로 날 이끌어준 그들은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순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선택한 지금의 내 모습에서, 어쩌면 나에게 그러했던 그들을 통해 배운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새싹에게 건강하고 단단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전히 바라본다.

난 가지치기와 가지 다듬기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는 순간에 가지 고르기를 할 것이다.

난 그들에게 찾아온 겨울에 힘없이 움츠려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진다.

나의 가을이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높은 산과 같은 그들이,

흐트러짐 없는 강인한 모습의 그들이,

세상의 따스함을 가진 그들이,

이젠 추워진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런 겨울에 움츠려진 모습이 낯설고 슬프다.


난 그들이 걸어온 흔적 없는 발걸음을 따라 지금까지 잘 왔다.

하지만 이제 나의 봄에 그들의 모습과, 나의 여름에 그들의 모습이 없어지고, 그들의 가을을 알지 못했는데, 난 가을을 시작했다.

나의 새로운 새싹의 봄과 함께,

난 그들의 흔적 없는 발걸음으로 지금의 나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가을을 보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한 그들에 모습만 보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가을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들의 지침이 더 이상 없었다.

이젠,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온전히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했던 그 순간부터 그들은 나에게 더 이상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그 순간이 그들의 가을이었던 것 같다.

난 내가 선택한 삶으로 생활하다 그들의 가을을 보지 못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나의 선택으로 무언가 알 수 없었던 무게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조금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었던 짐을, 이젠 내가 새롭게 만든 세상에서 온전히 나의 힘으로 그 짐을 짊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늦은 봄과 초여름에 나를 건강하고 단단하게 단련해 주었던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선택하고 새롭게 만든 세상에서 내가 책임질 삶의 짐을 잘 견디고, 버티며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은 나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


그때 난 그걸 몰랐다.


그들이 겨울을 시작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알게 되어, 이런 내가 후회스럽다.

나의 가을은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난 모르겠다.

무언가 열심히 살아오고, 무더웠던 긴 여름을 잘 이겨냈고, 40대를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에게 알 수 없는 우울함과 불안함이 찾아온다.

그들이 그렇게 단단하고 용기 있는 나를 만들어 주셨는데, 난 알 수 없는 무게로 점점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찾아온 겨울이 그들을 움츠리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그래도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전처럼 빠르지 않지만, 힘 있는 발걸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지금 나의 가을은 날 우울함과 불안감에 뒤돌아봐도 무엇을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잘 왔다고 생각한다.

너무 긴 시간을 긴 계절들을 나는 보내왔고, 그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말해보지 않아서 말하기 어렵고, 말해본 적 없어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로 인해 시작하는 봄의 새싹에게 내가 배운 것처럼, 그들이 보여 준 것처럼, 나도 나의 새롭게 시작하는 봄에게 가르침을 전해준다.

여전히 그들은 나에게 가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배움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일 수 있다.

그들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던 가을의 모습을 난 보려고 하지 않았고, 배우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난 그들에 보살핌과 지혜로 나라는 나무에 풍성함을 가질 수 있었고, 내가 가진 나무의 풍성함으로, 나로 인해 시작하는 봄을 새싹 같은 아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난 나의 가을이 우울하고 두렵고 불안하다.

어떻게, 이 가을을 가야 되는지 나에게는 지혜가 부족하다.

나의 선택과 그로 인해 무엇인지 모르는 책임감의 무게가 조금씩 버거워 나아갈 힘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난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씩 그들의 겨울을 본다.

그들은 나에게 지금도 지혜를 주고 있다.

말없이 그저 지혜를 나에게 아무런 바람도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빠르지 않지만, 힘이 넘치던 그때 그들이 아니지만, 지금도 나에게 지혜를 보여주고 있었다.

느려도 힘이 없어도 내가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 지혜가 그들이 내가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볼 때까지 나에게 말없이 기다리며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서로 말없이 함께 가면서 보게 되었다.

나의 여름부터 난 그들과 함께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

이제 난 말없이 그들의 옆에 서서 걸어본다.

그들은 말없이 걸으면서 내게 가르쳐 준 가을은 흐트러짐 없이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맞이한 가을에 스스로 흐트러져 버리면, 나를 보고 자라는 새싹의 봄이 어찌 여름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나에게 찾아온 가을에 새롭게 시작하는 봄의 새싹이 여름을 맞이하고, 건강하게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내가 흐트러지면 안 된다.

그들이 나에게 항상 보여준 것이 똑같았다.

흐트러지지 않고 꾸준하게 계속 나아가는 그거 하나였다.

지금까지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들의 발걸음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에는 나의 봄과 여름에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의 결과가 나였던 것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찾아온 겨울에 그들의 발걸음에서 흔적이 남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흔적을 잘 보고, 그대로 걸어가면 된다.

내가 흐트러지지 않고, 그들의 흔적을 잘 따라가야 내 뒤를 따르는 지금 새로운 봄날의 새싹이 무더운 여름을 지나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의 겨울에서 점점 흔적이 흐려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젠 더 이상 나에게 지혜를 전해줄 수 없는 그들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이제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봄의 새싹이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을 잘 이겨내고, 마음이 건강하고 몸이 단단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나에게 선물로 찾아온 그 새싹이 자라서 여름을 이겨내고, 가을을 맞이할 때쯤, 나에게도 겨울이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그들이 가르쳐 준 지혜처럼 나도 지혜롭게 말없이 전해줄 것이다.

그 모든 계절이 너를 이곳까지 흐트러짐 없이 잘 올 수 있도록 이끄는 지혜였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 줄 것이다.

그 새싹이 다른 새싹을 키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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