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보려면 시간과 돈을 어디 쓰는지 본다
나는 언제부터 가계부를 썼을까? 내 기억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용돈기록장을 쓰는 모습을 기특해하며 추가로 용돈을 주셨던 부모님이 기억나는 걸 보니 나는 정말이지 어릴 때부터 기록하는 걸 좋아했나 보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용돈기입장이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2001년.. 무려 22년 전의 기록! 일반 노트의 오른쪽 페이지에는 세로로 줄을 그어 [날짜, +/-금액, 항목, 잔액, 비고] 이렇게 열을 만들어 적어 내려갔고, 왼쪽 빈 페이지에는 영수증이나 영화 티켓 같은 것들을 붙였다. (맨질맨질한 재질의 영수증들은 색이 바래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영화 티켓이나 다른 영수들은 항목이 정확히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금전출납부를 적은 건 아니지만 대학 입학하고 나서도 노트에 종종 수입/지출을 적어왔다. (이때가 현금과 카드를 함께 쓰던 시기였다.) 이후에는 계속 체크카드를 쓰다 보니 잔액은 통장 잔고로 확인하고 입/출금내역으로 가계부 쓰는 걸 갈음했었다.
언제부턴가 다시 관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편한 가계부]라는 앱으로 모바일 가계부 생활을 시작했는데, 결혼 후 서로의 가계부를 하나로 동기화하기 위해 지금은 공동으로 [클머니]라는 앱으로 가계부를 적고 있다. (편한 가계부는 이제 공동 관리를 위한 동기화 기능을 제공하는 것 같고, 클머니는 서비스는 운영되고 있지만 더 이상 구글플레이/앱스토어에 게시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작성한 가계부를 바탕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리뷰 시간을 갖는다. 리뷰는 연초에 작성한 계획과 현황을 비교하는 자리이다. (많이 썼다고 자책 혹은 문책하거나, 초과분만큼 다음 달 예산을 줄이거나 하는 건 아님!)
연초에 한 해의 계획을 미리 세워둔다. 월간 변동비 지출 예산과, 연간 지출 계획을 잡는다.
월간 변동비 지출은 고정적으로 나가는 고정비(통신비, 보험료, OTT 등)를 제외하고 식비, 생활용품, 교통비(주유비/대중교통이용 등) 등의 변동비 예산이다.
연간 지출 계획은 월단위가 아니라 연단위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계획으로 자동차보험과 세금(자동차세, 주민세 등)과 가족행사비 같은 고정 지출과 여행, 공연관람, 도서, 차량유지비, 경조사비 등 변동지출을 함께 잡는다.
이건 엑셀 시트에 실제 지출을 분류별로 입력하면 실제 예산보다 많이 썼는지 적게 썼는지 자동으로 계산되도록 해두었다. 어떤 분류에선 넘치고, 어떤 분류에서 남은 경우 총 합하여 월 예상 지출에서 초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카테고리를 각각 계산하는 것은 아니고 크게 3개 그룹으로 묶어서 실지출과 차액을 비교한다)
앱에서 분류별로 통계를 다 내주기 때문에 숫자 몇 개만 입력하면 금방 리뷰가 가능하다. (앱에 예산을 설정하면 자체 리뷰가 가능하지만, 원하는 테이블로 소팅해서 보고자 하는 니즈가 있어서 별도로 작업해 둠) 한 달을 마무리하는 개념으로 이달의 특이사항은 어떤 게 있었는지, 추가예산이 필요할지 판단하여 조정하기도 한다. 이러면서 한 달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가계부를 쓰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지출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돈을 쓰고 나면 입력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 돈을 쓰면 반드시 기록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입력하기 귀찮아서 돈을 안 쓰게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 한 달에 얼마나 쓰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점만으로도 가계부를 쓰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예산을 설정해 두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앱으로 푸시를 보내준다고 한다. 다만, 나의 결제정보들을 연동을 통해 한 서비스에 모아서 제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수기로 입력하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통해 예산을 잡을 수 있다
가계부를 쓴 지는 수년이 지났지만 사실 '기록'에만 치중할 뿐 예산 관리 개념으로 돈 관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2021년에 조금 각성한 뒤로 2022년부터는 월간지출 예산과 연간지출 예산을 별도로 책정하여 매달 모니터링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때, 2022년 예산을 잡기 위해 2018년, 2019년, 2020년 3개년 지출내역을 참고하여 적정 수준의 예산을 책정할 수 있었다. 과거의 기록이 없다면 정하기 어려웠을 부분이다.
가치관과 생활 패턴 파악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의 말보다는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편이다. 말은 이상일 수 있으나 행동은 현실이니까. 그 사람의 행동 중에서도 그 사람이 어디에 시간과 돈을 쓰는지를 보면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돈만큼 가치 있는 재화가 없기에 그 재화를 어디에 할애하는지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가계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맛집 이름을 금방 찾을 수 있다
가계부에는 상호명으로 타이틀을 입력하기 때문에 여행 가서 먹었던 음식점 이름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추억을 회상하기에도 좋다. '우리 그때 제주도에서 삼겹살 먹었던데 이름이 뭐였지?'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가계부 앱을 확인하면 된다.
매일 짧게라도 기록하면 그냥 휘발되어 버릴 하루하루가 흔적으로 남는 것처럼, 가계부야 말로 내가 어디에 돈과 시간을 썼는지 보여주는 좋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돈으로 쓰는 일기를 계속 쓸 예정! :)
* 협조해 주는 짝꿍께도 감사!
사진: Unsplash의 Chris Brig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