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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바람 Aug 17. 2023

글을 쓰는 건 줄곧 내게 동경이었다.

 글을 쓰는 건 줄곧 내게 동경이었다. 중학생 시절 소설을 쓰고 싶었다. 뭐,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일 수 있는데 나는 몽상을 자주 했다. 어딘가 존재할 법한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평행우주나, 화이트홀, 웜홀, 이런 개념들의 책도 즐겁게 읽었다. 특히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가 너무너무 재밌었다. 한때는 물리학자를 잠깐 꿈꾸기도 했으나 그러기엔 내가 수학을 너무 못했다. 물리학자, 특히 천체학자가 되기 위해선, 어떤 현상을 발견하면 그걸 수학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어릴 적 수학 익힘책에서 '정답을 구하시오',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제일 싫었다. 수학에 있어선 커리큘럼을 따라가고 원리를 이해하는 것조차 벅찼다. 이해가 안 되면 왜지? 하는 생각에 빠져서 다음 스텝을 밟지 못하는 성향을 타고났는데, 수학이란 게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대학수학까지 넘어가야 하니 선생님들도 참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내가 구상했던 소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SF와 관련한 소설인데 잘 사는 지역과 못 사는 지역이 철저히 분리돼있다. 잘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젊음에 대한 욕망이 있다. 이건 과거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젊음을 갈구했던 그런 것에서 모티프를 받았다. 거기에 당시에는 또 과학 특히 생명이랑 지구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과학뉴스나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었다. 한 기사에  '프랑스 생리의학자 폴 버트는 1864년 실험용 흰쥐도 마리의 옆구리 살을 일부러 도려내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는 상처 부위를 서로 맞닿게 한 뒤 봉합해 버렸다' 라며, '당시 버트 박사가 어떤 결과를 노리고 이 실험을 진행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대 과학계에 기여한 바는 분명히 있다. ‘불로장생(不老長生)’ 연구의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366/0000246434?sid=001

 이러한 연구는 불로장생의 연구로 이어졌다고 한다. 2015년 이후 관련 기사가 뜨지 않았고, 이 소재로 글을 쓰다가 말 다했었기에 잊고 있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2016년도에 유튜브에 관련 내용이 더 발전돼 올라와 있다. 이 영상도 조선일보에서 취재한 내용이다. 누군가 이 실험에 열정이 있었나(?)


https://www.youtube.com/watch?v=mgshuLbbYFM

 나는 이 실험을 기반으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아이들이 겪게 되는 일, 객체연결을 위해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구상해서 소설을 쓰고 싶다. 거기에 윤리의 젊음을 탐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까지. 중학생 때의 나에겐 꽤나 까다로운 주제였고 공부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 당시 태아를 길러내는 연구실을 그리며 구상하다가 친구들이 '너 이 그림 뭐야' 며 이상한 취급을 당하기도 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걸 하고 싶었지 하는 기억이 되살아났으니 언젠가 이 소설을 완성할지도 모른다. 이젠 생명과학도 공부했고, 고등학교 당시 읽었던 바이러스나 기생충에 관한 책(당시 지질학자, 기생충학자, 생명과학자도 꿈이었다.)도 정말 흥미롭게 봤다. 스토리는 영화 '메이즈러너'나 애니'약속의 네버랜드' 대충 이런느낌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몇 년째 구상하는 단계이니 죽기전엔 꼭 소설로 출간을 해야지. 최근에는 서퍼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야기 이런 소설도 써보고 싶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니 영감이 폭발한다. 더 돌아다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경청해야지.


 나는 경험과 지식을 갈구하는데, 그 본질적인 원인은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인 것 같다. 늘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내 이야기를 세상밖에 꺼내는 건 싫었다. 그러면 가상의 이야기들을 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아야 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하고, 여행을 가고 싶었다. 여행 가서 글 쓰는 게 내 꿈이야.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으니까.


 이제 혼돈의 입시의 시기를 지나, 공부 외에 다른 것들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엄했던 아빠 밑에서 자라 어딘가 이동하거나, 밤늦게 들어가는 것에 늘 제한이 있었다. 타지로 대학에 가고 기숙사에 살다 보니 미쳐 날뛰었다. 밤새 술 마시다가 수업에 들어가고, 술 취해서 자느라 수업도 못 들어가 보고(다행히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이었다.) 운동도 미친 듯이 하고, 하고 싶은 걸 다하려고 진짜 뛰어다녔다. 그때 학교 신문사 포스터를 봤다. 해외연수 기회도 있고, 월급과 원고료도 받을 수 있었다. 무작정 신문사로 가서 지원서 양식을 받았다. 굉장히 열정적으로 작성을 해서 냈는데, "이렇게 열심히 쓴 건 또 처음 보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학기부터 나는 수습기자로 활동을 하게 됐다. 학교 밖과 안을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인터뷰를 하고, 머리를 짜내 시즌에 맞는 적절한 기획을 만들어 일주일 내에 몇 개의 기사를 발행했다. 추후에는 러시아로 해외연수를 가서 고려인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기도했다. 강제 이주를 하면서 당해던 취급과 그 당시에 아픔때문에 대부분의 고려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거주를 꺼려한다는 것도 알았다.


 당시 교내 신문은 12면의 주간신문이었고, 편집장, 부편집장을 포함해 5명만 남았을 땐 한 명당 기획기사 포함 3-4개는 기본으로 맡기도 했다. 발행한 신문을 보면 1장의 신문이 모두 000 기자, 내 이름으로 돼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약 2년 반간, 대학생활의 절반정도를 글을 쓰며 보내니 졸업할 때쯤엔 약 90건의 기사가 내 이름으로 발행됐다. 기사문을 쓰는 구조, 헤드 작성법, 맞춤법, 간결하게 글 쓰는 법, 피라미드형 글 이런 것들이 정말 많이 단련됐다. 갈수록 글을 완성하는 시간도 줄었다. 편집장 제의도 몇 번 받았으나 거절했다.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신문사에만 종속될 수 없었다. 나중엔 수습기자분들 첨삭을 도맡아 해주기도 했다. 특히, 스포츠 코너를 맡아 매주 감독, 코치님, 선수들을 인터뷰했다. 국가대표에 선발된 동기와 선배, 후배님들을 모두 인터뷰했다. 또한, 각자의 고충과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를 2년 반동안 한 번도 누락되지 않고 3일 안에 원고를 완성했다. 월요일은 회의, 화, 수, 목까지 마감, 금요일은 교정 이렇게 하면 정말 3일 내에 글을 작성해야 했다.

 만약 인터뷰가 취소라도 된 경우엔 대학로에 나가 운동부 애들 아무나 잡고 "주변에 국대 선발 된 애들 있어?", "곧 시합 나가는 애들, 혹은 시합 가서 성적 내 온 애들 있어?"라고 물어봤다. 과사무실에도 들락거리며, "뭐, 인터뷰할 사람 있어요?" 하며, 기사거리를 찾아다녔다. 생각해 보면 참 열심히도 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줄었고, 블로그도 2년이나 운영할 수 있던 거겠지. 그때 글을 썼던 관습이 아직도 남아 오히려 글을 쓰지 않는 게 내겐 너무 힘들다. '아 왜 이렇게 스트레스받지?' 하면 글을 쓰지 않아서다. 주기적으로 내 생각을 방출해줘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머릿속에만 흘러 다니니 너무 힘든 거다. 나는 글 쓰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무기력했던 내게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자극을 주셨던 분에게 재차 감사하다. 다 식어 불씨만 남은 장작에 기름을 콸콸 들이부었다.


난 글을 써야 하는 관습을 해소하기 위해 일상 블로그를 시작했었다. 2년간 빠지지 않고 나의 한 달 일상을 기록했다. 이걸 시작하는 이유에는 대외활동을 알아보다 블로그가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하길래, '블로그? 나도 키워주겠어. 대외활동 씹어먹겠어' 하며 시작했던 것도 있지만 나중엔 진심이 돼버렸다. 맛집, 언어공부 기록, 중화 노래 가사번역, 여행 정보공유, 경제공부 등 다양한 주제의 포스팅을 발행했다. 주변의 꽤 많은 블로거들의 고충이듯 나의 기록의 공간으로 남길지 아니면 정보성 블로그로 탈바꿈해 네이버 검색엔진에 노출을 노려봐야 할지.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현재는 중간의 애매한 포지션에서 이도저도 아닌 정체성을 가진 블로그가 됐다. 하나, 내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기에 내 블로그는 참 소중하다. 중간에 글 EGO프로그램에 참여해 소설을 쓴 적도 있지만 이 소설은 읽을수록 부끄럽기에 이 이야기는 생략.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고,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니 그런 갈등이 해소됐다. 이제 정보는 블로그에, 나의 기록은 브런치에 모호했던 구분이 명확해졌다. 그렇게 되니 블로그를 통해 지인분들의 마케팅을 SEO(검색엔진최적화) 마케팅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 시 블로그 상위노출을 해서 해당 브랜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비용이 들지 않는 마케팅을 할 수 있는 블로그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지인분들은 참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주는 분들이다. 그럼 어? 이거 제가 포스팅해드릴게요. 하면 지인분들도 좋아하고, 나도 무언가 도움 될 수 있음에 참 감사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 일을 쉬고 있고, 마침 건강상으로 여유를 찾아야 하는 요즘 '그래하고 싶은 거 다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이에 따른 사회적인 시간으로 봤을 때 남들보다 늦어지고 있음에도 조급하지 않다. 힘든 일을 고, 나의 생각을 기록하고 그 기록된 생각들이 현재의 내게 다시 영향을 주고 그런 것들이 반복돼서 그런 것일까? 이제는 블로거로서 작가지망생으로서 글을 가까이하는 삶을 사려고 한다. 언젠간 '지망생'이라는 단어를 빼고 '저 작가예요'라고 할 수 있는 미래도 오겠지. 그럼 정말 감사하고 행복할 거 같다. 현재의 글들이 쌓여서 밑거름이 돼 나중에는 빛을 바랄 거다. 천천히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해나가야지. 마지막으로 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준 것에 너무 감사하다. 글을 쓴다는 건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고, 독자는 일방적으로 내 의견을 듣는 행위라 생각한다. 내 글에 시간을 쏟아준다는 것은 나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줬다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쓸 거다. 이건 나의 각오이자,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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