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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트라우마

이러다 다시 그걸 생각하게 되면 어쩌지.

by 바다바람

무기력은 곰팡이처럼 나타나 한순간에 내 몸을 지배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간대도. 그 곰팡이가 퍼지면 아둔해진다.

최근에 성폭력 생존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는 박사님과 만났다. 실험자와 피실험자의 관계로. 나는 그 실험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반, 그래 내 경험을 좀 팔아먹자. 이것도 경험인데 팔지. 하는 마음 반이었다. 연구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사실 나는 불안과 답답함을 느꼈다. 다시 그 기억을 회자하는 건 아직도 내겐 어려운 일이다. 매스꺼움에 제자리에 일어나 눈물을 삼키는 것도 수백 번. 불안함에 몸을 웅크려 이불아래 숨어있는 날도 골백번. 그래도 말해야지. 그래도 이 경험으로 도움이 돼야지.


그런 마음으로 박사님을 만났다. 면담이 이뤄졌다. 나는 어떻게든 핵심적으로, 상세하게, 내 내면과 감정을 복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박사님은 간식을 잔뜩 챙겨 오셨지만, 죄송하게도 그걸 먹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새로 안 사실이 있었다. 내가 느낀 증상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혼란이 온 상태고. 생존을 위해 주변을 차단하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진단명은 불안 발작이었는데. 그건 의학적인 측면이고 심리학 박사님의 견해는 그랬다. 엄청난 위기에 상황에 놓였을 때 주변을 막아버리면 내가 다른 의미로 나를 보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생존을 위해 특화된 특징이라 했다. 굶주린 호랑이 앞에서 다리를 다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패닉이 와 굳어버리는 사슴과도 같은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때 나는 죽을 것 같고 숨이 넘어가고 몸도 움직일 수 없지만. 그게 정말 죽으려는 것이 아닌 나를 지키려는 반응임을 알았다. 사라지고 싶고, 갑자기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이런 삶이라도 나는 살아내고 싶나 보다. 살아내고 싶어 그런 반응을 해 나를 지키려나 보다 생각했다.


박사님은 내게 이 실험에 참여한 계기를 물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실험에 참여하면 나오는 참가비였지만 조금 가식을 떨기로 했다. 가식이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제가 재판에 갔을 때 상대측 변호사가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물로 제시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네 XX 포털사이트의 지 X인의 문답을 가져다가 증거물로 쓰더라고요. 제 행동을 전문적으로 분석한 것도 아닌 그냥 그 포털사이트의 전문가가 쓰지도 않은 응답을요. 그런 것조차 재판에서 증거물이랍시고 들이미는데. 전문가가 쓰는 논문은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다른 생존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제 사례를 보고 누군가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박사님의 논문이 잘 완성되는 것도 응원하지만요. 이 말은 마음으로 삼켰다.

"제가 피해를 받고 당장 관련 문장도 보지 못했지만요. 정신을 좀 차리고 검색을 해보니, 변호사, 로펌 광고밖에 안 뜨더라고요."

박사님은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 하나 붙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그게 광고로 돈벌이 수단으로 쓰이는 게 마음이 미묘했다. 당연히 그들은 피해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물론 그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헤쳐갈지 알 수 있는 건 또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이런저런 증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박사님과 면담을 마쳤다. 한 일주일간은 기운이 없었다. 다시 그 일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운이 빨리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누군가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당하더라도 자신의 탓을 안 했으면 좋겠고, 주변사람의 조그마한 관심이 이곳이 닿으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에 그렇다.


아직도 우울감에 빠지고 무기력에 빠져 모든 걸 다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많지만. 그래도 살아가고 있다. 잘 살아가려 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에겐 어떤 말을 해도 힘들 거다. 정말 정말 정말 힘들 거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간 볕이 든다. 내가 피하고자 하지만 않으면, 이겨내 진다. 그래도 한번 살아가보자. 무기력하면 무기력한 채로, 우울하면 우울한 채로 그냥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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