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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바람 Sep 07. 2023

트라우마 #2

재판 최종기일이 잡혔다. 감정을 다잡고 2편을 써본다.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이 기억을 회상해내는 건 참 어렵다. 작가의 서랍 속에 조차 넣으려 하지 않았다. 난 이 트라우마 시리즈를 쓸 때는 와다다 써 내려가고 다시 쳐다보지 않을 거다. 내가 쓸 글, 내가 쓴 글이지만 다시 쳐다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내 경험이 도움이 되고 싶다. 그래도 나는 잘 이겨내고 있다고, 잘 살아가고 있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산부인과에서 상황이 정리됐다. 옆에 있던 도영이는 내 손을 꼭 잡아줬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지금 회피하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차례가 됐다. 진료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성관계를 했냐고 물어봤고, 그렇다고 말했다. 꼭 질문은 파트너나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말이었다.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거기에 가서 내가 당한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되기 싫었다.

회음부 부분이 찢어져 상쳐났다. 이런 상태에는 전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흔히 일어나는 경우라고 한다. 해당 부위가 화끈거렸다. 그냥 질염약 처방을 하고 그렇게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갔다.


 종종 그렇게 원나잇을 하고 끝내는 사람들이 있다고한다. 내가 한 게 진짜 원나잇인가? 나는 좋아서 그런 건가, 근데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는데. 누구의 잘못이지. 내 잘못인가. 내가, 다 잘못한 건가. 내가 감히 신고해도 되는 걸까. 난 의식도 없고 기억도 끊겼는데. 내가 어디를 걸었는지, 어떤 호텔에 들어갔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특정 기억만 선명했다. 정황도 다음날부터 연락을 회피하고,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선배는. 나는 그냥 멍했고, 도영이와 신고를 도와준 지인들은 화를 낼 뿐이었다.


 다음날은 뮤지컬을 보러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광호 배우님의 데스노트임에도 집중이 안 됐다. 머릿속엔 계속 사건 생각이 났다. 도영이가 하는 말에 웃고 즐거운척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또 다음날에는 중국어 스터디를 나갔다. 몸이 한없이 축 쳐졌지만, 그런 일에 나 자신을 무너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중국어 스터디에서도 멍했다. 무슨 말을 해도 5박자는 늦게 "네?"라고 대답했고, 연락을 준다던 선배는 계속해서 전화를 회피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데,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확정을 짓고 싶은데, 차라리 그냥 좋게 마무리 됐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었다.

 

 스터디에 새로 오신 한 분과 카페에 가기로 했다. 카페에 가는 내내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괜찮다고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하나, 얼굴에서 티가 났나 보다. 결국 4시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 괜찮은 척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하면서 몸이 떨리고 눈물이 계속 났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스터디분은 안절부절못하면서 휴지를 져다 줬다. 눈물까지 흘린 이상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다 말해버렸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단 그 선배랑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는데, 그 선배는 계속해서 만나는 시간을 늦췄다. 계속해서 회피하고 있었다.

"진짜 여동생이 있는 남자로서 수치스럽다. 그렇게 또 만났다가 2차 피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통화로 얘기해요"

"근데 만나야 회피를 안 하지, 또 통화로 얘기하면 회피하거나 끊으면 어떻게 해요?"

"그럼 신고해야지 그 xx잘못인데, 아니 어떻게 여자애를, 술 먹은 애를 그렇게 할 수 있어"

 정말 쒹쒹대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줬다. 처음 본 사이었지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게 고마웠다. 한편으론 화나는 감정이 들지 않는 내가 이상했다. 10시에 전화를 준다는 선배는 11시가 넘고 12시 정도까지 전화가 되지 않았다. 그 스터디 지인분은 통화할 때 같이 있어주겠다며, 경기도가 집임에도 집 앞까지 와서 옆에 있어줬다.  나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손을 덜덜 떨고 계속 멍한 상태였다.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우선 녹음기를 켰다. 차분히 하나씩 확인했다. 결론은 성폭행이 맞았다. 현재 최종기일을 남겨놓고 하는 말인데, 강간에다가, 준강간이고, 준강간 치상이 죄명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다. 그냥 변명, 스터디 지인분께는 만나서 한번뜨자는 유치한 말. 용납할 수 없었다. 경찰에 내 일로 신고해본적이 없었다. 스터디 지인은 남자임에도 자신이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자한테. 그때는 돈이 없어서 돈을 받고 합의했는데 그게 아직까지 후회라고 평생 상처로 남는다고, 너는 꼭 끝가지 가서 처벌받게 하라고 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며. 112에 신고하고 근처 파출소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을 했다. 누군가를 신고한 적도 처음이고, 그래도 과선배였는데 감옥에 가게 된다는 것도, 이게 남에게 해가 될 수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온갖 고민들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그 사람의 명백한 잘못이니까)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이게 맞나요. 제 잘못이 아니죠? 그 사람이 잘못한 거죠? 울면서 물었다. 사실 수사관님은 그걸 판단할 수 없다. 정확하게는 신고가 막 들어온 상황에서 판단할 수 없다. 가해자 측 피해자 측 증거와 이야기를 들어보고 검찰로 넘기고 검찰에서도 수사를 좀 더 진행하고, 그 사람이 잘못한 여부는 결국 판사가 진행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여자 수사관님은 국선 변호사신청을 해주겠다고, 절차를 잘 설명해 주셨다. 또 알고 보니 여성 변호사님으로 지정 선임을 해주시기도 했다. 배려심 넘치는 감사한 수사관님을 만났다. 추후 선정된 강변호사님도 참 좋은 분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수사는 변호사님과 미팅을 하고 하는 게 좋을 거라고 날짜를 미뤄주셨다. 이제 시작이었다. 진정한 시작. 그리고 엄청난 상처와 고통의 시작이기도 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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