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바람 Aug 06. 2023

무기력

종종 찾아오는 무기력에 관하여

  사건 이후 무기력이 찾아오곤 한다. (는 성범죄 피해자다) 온몸이 축 늘어지고 심장은 쿵쿵 뛰고. 그러면 난 아무런 의욕을 찾을 수 없다. 심장이 뛰는 상태는 계속 지속되는데 이럴 땐 필요시 약을 먹어야 한다. 자칫하면 공황발작으로 이어지기에 내 상태에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과 감정을 계속해서 돌아보고 왜 그럴까 의문을 품는다. 종종 이유 없는 무기력도 있다. 그저 침대에 누워 불면으로 청하지 못하는 잠을 들도록 노력한다. 그럼 머릿속에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그러다 문뜩 사건 생각이 나면 다시 심장이 쾅쾅 뛴다. 축 쳐진 몸을 질질 끌고 물이라도 마신다.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숨만 쉬며 연명한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의 감정을 느낀다. 가만히 누워 호흡만 하면 난 송장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한다. 사회에서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일을 하는 걸 즐기는 사람인데 그렇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그럼 오디오북이라도 틀어놓는다. 멍하니 남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다. 이것도 나름의 무기력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내 정확한 진단명은 PTSD고, 하위항목에 우울이나 기분장애 따위의 이름이 있는데 의사 선생님께 굳이 내가 진단명을 자세히 따져 묻진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요즘은 좀 어때요?'라고 묻는다. '그냥 요즘 의욕이 없고, 짜증이 나고, 그래도 괜찮아진 거 같기도 하고'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의사 선생님은 차트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진단명은 재차 말하지만 전달하지 않는다. 그저 처방을 내릴 뿐이다. 내 진단명을 알게 된 이유는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떼면 서다.

 'PTSD와 비기질성 불면'

그럼 그냥 그렇구나 한다. 자세히 알고 싶진 않다. 보통의 사람처럼 아프지 않은 것처럼 지내고 싶기에. 나 그게 힘들다.

이젠 그냥 일부가 돼버렸다. 가슴이 뛰고, 종종 호흡이 가빠지고, 사건 관련 생각이 나면 식은땀이 조금 나기도 하고. 약이 안 맞으면 잠을 못 자기도 하고 최대한 기분은 다스리기 위해 노력할 뿐. 이 노력은 가벼운 노력은 아니다.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고, 기분과 감정 관련 책을 적어도 10권 이상은 읽었으니 말이다.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가해자는 아직도 합의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경찰조사 전부터 로펌을 고용해 적극적으로 법적 투쟁을 하고 있다.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런 증명은 의미 없다. 난 이미 그에게 범죄를 당했고, 정신적 질환으로 1년이 지난 지금도 고통받고 있으며 덕분에 하고 싶은 일들에 제약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해외를 장기체류하는 건 꿈도 못 꾸고 건강상의 이유로 직장도 그만뒀으니.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은 늘 재판 진행과정에 대해 궁금해하신다. 오히려 나보다 더 화를 내시기도 한다. "지금 그 가해자의 태도가 용납이 안되네요. 자기가 잘못이 없다면 00 씨에게 잘못이 있다는 소리잖아요" 나는 멍하니 "어? 그럴 수도 있네요. 생각 못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감정이 고갈돼 분노도 되찾기 힘든 상태였다.

나중에 간호사인 친구에게 의사 선생님에 더 화내주시더라라고 말하니, '네 숨겨진 감정을 찾아주려는 하나의 치료방법일 수도 있어'라고 했다.


최근엔 공황이 오고, 일하던 양양에선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했다. 30분간 구급차를 타고 갔지만 진정제 수액처방을 해주는 병원이 아니랜다.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타인에게 내 상태에 이해를 바라는 것도 이젠 지친다. 정신적으로 일하는 건 당분간 보류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하기로 했다. 몇 가지 조건을 만들었다.

첫째, 임금을 잘 챙겨주는 곳일 것.(돈을 모을 목표가 생겼기에)

둘째, 바다 근처에 서핑을 할 수 있는 환경일 것.

셋째, 의료시설, 특히 정신과가 잘 돼있는 곳일 것.


현재 가해자는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 형사재판 판결이 나면 가해자는 법정 구속이 된다. 재판은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데, 최종기일예정이었던 날짜에 증거물을 냈단다. 한 달이라도 더 사회에 있고 싶은 탓일 거라 변호사님과 의사 선생님이 입을 모아 말한다.


3주 치 밖에 처방 안 되는 수면제의 족쇄는 많은 걸 포기하게 했지만, 이젠 생각이 전환됐다.

족쇄가 걸려있다면 그 줄을 끝까지 풀어 족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해버려야지.

이 생각이 들기까지 수많은 무기력과 우울이 있었다. 한국인은 우울증에 걸리면 내가 게으른가?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것도 감기 같은 질병이고 호르몬 탓에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 무기력한 순간들도 인생에서 필요하다. 늘 힘을 주고 살 순 없으니까.


나름의 서퍼라고 서핑에 비유해 보겠다. 파도가 지나가듯 무기력도 인생에서 지나갈 거다. 너무 거세서 서핑에서처럼 통돌이도 당하고 계속해서 맞는 파도에 지치기도 할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간 파도는 반드시 잠잠해질 거고, 그 바다가 당신을 안아줄 거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서핑이랑 사별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