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하면 운동을 간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없어진다. 불안한 감각도 옅어진다. 불규칙한 호흡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에너지를 쏟게 된다. 그렇게 한두 시간 몸을 움직이고 나서 샤워를 하면 상쾌하다. 문제는 다시 학습되어 버린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요 며칠 감각이 이상하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게 불안한 감각도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불안하다. 굶주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고 눈앞에 있어도 눈하나 깜짝 안 하는 느낌. 내 생존을 위한 감각이 도태되고 있는 건가 싶다. 처음엔 그 감각이 싫어 필요시 약을 먹었다. 한 번에 두 알을 삼키고 또다시 두 알을 삼켰다. 감각이 더 고요해졌다. 그냥 저걸 다 먹어버려? 무심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약이 많이 남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에 의사 선생님은 위험하지 않을까요?라고 담담히 말했었다. 이후로는 기간에 맞게 약을 주셨고, 필요시도 남은 개수를 물어본 후 처방을 줬다. 그때는 나 약중독 아닌데, 나를 못 믿으시는 건가 싶었다. 못 믿을만했다. 충동적으로 이런 사고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약을 너무 많이 먹었어'라고 말했다. 친구는 한걸음에 달려와 함께 있어줬다. 정신이 몽롱해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덤덤한 감정 틈에 기어코 울음이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무감한 감정이 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감정은 날카롭고 다루기 힘들다. 조금만 잘 못 잡으면 나를 벤다. 부정적인 말로 나를 찌르고, 세상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들게 하고, 내 육체를 해하려 한다. 그렇기에 더 조심스럽게. 내가 다치지 않도록 잘 다뤄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의사 선생님한테 우울하다는 말을 했다. 기쁘거나 슬프지도 않고 두렵지고 않고 위기감도 없고 모든 것에 무감하다 말했다. 병원을 바꾸고 가장 긴 진료였다. 의사 선생님은 스트레스의 여부와 수면 시간 평소 활동 생활등을 물어봤다. 그리곤 아침약을 추가로 넣어줬다. 수면 전 약도 구성을 바꿨다. 몇 달 만에 바뀌는 약 구성이지 싶다. 내 삶의 다른 면은 대학원생이자 남을 가르치는 선생님, 강사님이며, 운동을 좋아하는 여성, 수영장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라이프가드인데. 범죄의 피해자인 나의 면은 숨기기도, 끌고 가기도 다루기도 힘들다. 늘 변화하는 사고와 감정의 바다에서 이 정도까지 생존하며 흘러온 것도 물론 대견한 일이겠지.
내 안의 위험한 칼을 잘 다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