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마음먹고 서유럽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패키지여행이다. 자유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나는 24가지 이유로 영어를 못하는 영어울렁증이 있는 데다 소심쟁이다.
영국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가 마지막 행선지였다. 이탈리아 여행 3일 차. 패키지여행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울며 겨자 먹기의 쇼핑몰 방문이다. 요리조리 피해 가지만 가이드 눈치가 보여 적당한 선에서 하나쯤 구입해야 했다. 와인과 올리브유로 만든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들렀다. 술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겐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선물용으로 올리브유로 만든 비누를 골랐다. 보기엔 녹색 빨랫비누처럼 생겼지만 피부에 좋다니 믿고 샀다. 다음엔 와인이다. 누가 애주가 부부 아니랄까 봐 이것저것 맛보고 상큼한 화이트와인 몇 병을 골랐다. 옆에 있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욕심껏 와인을 고르고 계산대에 다가간 순간 카운터에 있던 젊은 남자가 느닷없이
“혹시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했다. 설마 내가 이런 곳까지 와서 꼰대력을 발휘했나 싶어 귀를 의심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꽂혀 있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니 어라, 한 술 더 떠
"U시에서 오셨나요." 했다.
어리바리 끄덕끄덕.
“선생님, 저 성준(가명)입니다.” 젊은이는
S중학교 졸업생으로 내게 사회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허걱'
여러분도 살면서 이런 경험 더러 있으신지? 이역만리에서 십오 년도 더 지난 제자를 우연히 만나는 경험 말이다. 반갑게 악수하는 사이 일행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반가움, 놀라움, 그리고 당혹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착하게 살게요. 선물 대신 제발 저의 과오가 밝혀지는 일은 없도록 해 주세요. 일테면 그때 내게 맞아서 엉덩이가 삐뚤어졌다든가, 아니면 복수하기 위해 한순간이라도 당신을 잊어 본 적이 없다든가 이런 소리만은 제발 듣지 않게 하소서. 짧은 순간에도 나의 안녕을 빌었다.
성준은 성악을 전공하는 유학생이었다.
이 년 전 유학 와서 아르바이트 중이라고 했다. 쇼핑몰 사장 역시 음악 하는 한국인으로 유학 왔다가 주저앉아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나의 치부를 발설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급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선물로 건넸다. 음악적 재능은 경험하지 못했으나 인성으로 보아 그는 틀림없이 성공했을 것이다. 성준이덕에 특별 보너스도 따라왔다. 일행은 내게 담임도 아니었던 옛 선생에게 극진히 대하는 걸 보니 좋은 선생님이었나 보다고 칭찬했다. 집에 돌아와서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다 먹을 때까지 아들 앞에서 우쭐해지고, 남편 앞에선 목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경험은 또 어떠신가?
7년 전 남미 여행을 갔을 때다. 칠레의 파타고니아에 있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지날 때다. 초식공룡 밀로돈의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동굴을 보기 위해 올라가던 중이었다. 얇은 옷차림으로 바들거리며 날씨 탓으로 돌리고 구시렁대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맞지? ㅇ선생. 나 김 선생이야.” 몇 년 전 함께 근무했던 선배 교사였다. 딸과 남미 자유여행 중이라 했다. 그녀는 관광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멀리서 긴가민가 하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확실히 알았단다. 아, 혹시 내 목소리가 무슨 천상계의 소리쯤 되나 하는 착각은 사양한다. 그저 평범한 경상도 아지매의 투박한 사투리쯤으로 여기시길.
여기가 어디인가.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도 최남단이다. 여기서 옛 동료 만나는 것쯤이야 뭐. 이런 우연 누구나 겪는 거 아닌가. 사진은 증거를 남기는 법이다.
내친김에 하나만 더하자. 이번엔 인도다. 여러 나라 이야기하니까 여행 많이 다닌 자랑 같지만 이해하시라.
이 글 제목이 뭐였더라. ‘네가 왜 거기서 나와’니까 엉뚱한 장소쯤 돼야 읽어 줄 것 같아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인도의 타지마할 관광에 나섰다. 타지마할은 2018년부터 19년 초까지 369년 만에 대 청소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해 아니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예약 버튼을 꾹 눌렀다. 엄청난 규모와 매혹적인 자태에 벌린 입 채 다물기도 전에 또 다른 전경이 펼쳐졌다. 남편은 인생 사진 찍어 준다며 모델료도 안 주고 여기저기 마구 불러 세웠다. 나는 숭고한 문화재 탐방을 방해받아 살짝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러다 샤자 한과 뭄타즈 마할처럼 세기의 사랑을 꿈꾸지는 못할망정 싸우지는 말자며 다정한 척 셀카를 찍고 있을 때였다.
툭툭. 어깨를 건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언니~”하고 부르는 이 있으니 부부모임을 하는 절친한 동료 교사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이틀 먼저 도착해서 여행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는 곧 네팔로 가게 되니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다. 자유여행이라면 저녁에 만나서 기념주라도 한잔 하겠지만 각자 일정이 달라 아쉽지만 이별을 고했다.
같은 지역에서 삼십몇 년을 근무한 부부 교사다 보니 행동이 조심스럽다. 식당과 병원. 휴대폰 매장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샘, 저 누군데요.'소리는 반갑기도 하지만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온 6 가구 중 한 집은 남편이 담임을 맡았던 학생의 누나 집, 또 한 집은 M고등학교에서 내게 배운 학생의 집이다.
'잘 살아야겠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맞닥트릴지 모르는 인생.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뒤통수에 대고 욕 듣는 일은 없이 살아야겠다. 인생은 길고 인연은 거미줄같이 얽혀있다. 그 인연들이 내 인생을 수놓는 한 폭의 비단이 되어줄지, 나를 가둘 그물이 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