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다녀왔다. 다섯 번이 계획된 중 두 번째 산책이었다. 해설이 있는 토요 클래식 산책.
4월의 주제는 베토벤을 만난 슈베르트다. 음악 평론가 조희창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는 쉽지 않은 클래식 곡 해석을 귀에 쏙 들어오게 해 주었다. 피아니스트 박진우와 송영민의 아름답고 섬세한 연주는 시골살이하는 내 귀를 호강시켜 주었다.
클래식에 문외한이다. KBS 클래식 FM 채널이나 자주 가는 유튜브 채널 두어 개를 통해 부엌일 하면서 듣는 것이 전부다. 다행히 이날 연주한 베토벤의 월광 1악장이나 비창 2악장 같은 곡은 귀에 익은 곡이라 반가웠다. 마지막 연주한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은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 자주 듣던 곡이다. 통통 튀는 빗방울 같은 선율이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러시아풍의 단조곡이라 그런지 밝은 가운데 슬픔이 느껴지는 곡이다.
앙코르곡은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었다.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나란히 앉아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했다. 귀는 소리를, 눈은 건반 위의 손가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건반 위에서 4개의 손이 우아하게 춤을 추는 듯했다.
이 곡은 한동안 하루에도 열 번 넘게 들었다. 집안일에 손이 늦다 보니 빠르고 경쾌한 곡이 일하는데 기분을 돋워 준다. 자주 들어도 워낙 무지하다 보니 제목만 보고 행진곡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빠른 곡에 맞추어 행진이 가능한가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앙코르곡은 해설이 없어 집에 와서 찾아보니 행진곡이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 11번 중 3악장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나만의 부끄러움 목록에 또 하나 추가됐다. 즐겨 듣던 곡을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직접 보는 일은 가슴 설레고 벅찬 기쁨이었다.
요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룬 아마데우스란 연극이 각광을 받고 있다. 연극을 보지 못한 나는 여전히 모차르트 하면 아마데우스란 영화가 떠 오른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2번. TV에서 두 번 정도를 본 것 같다. 오페라는커녕 클래식 공연을 별로 접해 본 경험이 없는 내게 영화 아마데우스는 신세계였다.
1823년 눈보라 치는 밤.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정신병원에 수감된 한 노인이 그를 찾아온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한다. 영화 속 노인은 성공한 궁정 음악장 살리에리였다. 그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 때문에 심한 시기와 질투를 느껴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처럼 뛰어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간절함에 몸부림치며 모차르트의 악보를 분석하지만 오히려 모차르트의 천재성만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절망한 살리에리는 “신이여, 왜 내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 주시고 그것을 만드는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라며 울부짖는다.
자신의 평범함이 신에게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살리에리의 열등감은 현재 일인자를 시기. 질투하는 이인자의 심리를 나타내는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이라 불리고 있다. 이는 1984년 개봉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살리에리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 나타난 살리에리란 인물의 특성은 이미 오래전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극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실제의 살리에리도 열등감 쩌는 인물이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는 호기심 발동.
살리에르는 베토벤과 리스트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음악을 지도했고 오스트리아 빈 궁정 작곡가로 세간의 찬사를 받던 음악가였다. 서른여덟에 빈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받아 일흔다섯에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시대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고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모차르트에게 굳이 열등감을 품을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모든 공연을 가져간다.’라며 벌이가 막막하다는 투정 섞인 편지까지 아버지에게 보냈을 정도였다.
살리에리는 그런 모차르트를 여러모로 챙겨주었고 모차르트의 아들을 비롯해 형편이 딱한 후배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쳤다. 음, 그러니까 그는 열등감에 쩌는 찌질이가 아니라 인품이 훌륭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살리에리는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푸시킨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앗, 소름! 살리에리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소리칠 것 같다. '내 명예 돌리도~'
그렇다면 푸시킨은 왜 살리에리라는 인물을 그렇게 묘사했을까?
모차르트라는 비범한 천재 음악가와 살리에리라는 평범한 인물을 통해 예술에 있어서 재능과 노력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속의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천재를 따라잡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의 고뇌와 좌절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난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지. 난 그 평범한 사람들 중 최고요! 그들의 수호자이기도 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한다.
살리에리의 말은 나같이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에게 느끼는 시기와 질투심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독백은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고 공감을 준다.
여태껏 영화 속의 살리에리라는 인물만 생각하고 오해가 깊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나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란 이름까지 붙여져 질투의 화신으로 기억된 그가 얼마나 억울할까 싶어서다. 보통 사람의 대변자로 불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질투의 화신’이란 오명은 벗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의 살리에리처럼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삶은 평생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진정한 라이벌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까’하고 나도 살리에리처럼 중얼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