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에 교장이 바뀌었다. 지나치게 열성적이던 교장은 교육부 시범학교까지 벌여 놓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가버렸다. 새 교장의 물망에 오른 사람중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제발 그가 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기도발이 듣지 않았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너무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는 2년 동안 내 통장의 주인으로 살았다. 이런 얘기를 교직 이야기에 써도 될까 망설였지만 쌉싸름한 기억으로 치고 무슨 사연인지 풀어 본다.
여중에 근무할 때였다. 같은 부서의 L부장이 넌지시 말했다. “0 선생, 삼백만 원만 좀 빌려 줘. 금방 쓰고 돌려줄게.” 아파트 대출금 갚느라 생활비도 빠듯했던 30대의 내게 삼백만 원이란 돈은 약에 쓸래도 없었던 시절이다.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돈이 없는 게 미안해야 할 일이란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눈빛에 먹이를 낚아채는 듯한 섬광이 일었다.
그녀의 한 마디 "♥♥은행카드 있잖아?"
석 달 전. ♥♥은행을 다니는 교감 선생님 딸이 실적을 쌓기 위해 출장을 나왔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새내기 직장인을 위해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발급받은 신용카드는 사용하지 않으면 3개월 후 중지시키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받아 둔 카드와 통장을 서랍에 던져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L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경제관념 없고, 귀 얇고, 남 잘 믿고, 멍청한 나를 말하는 거다. 그렇게 그녀는 내 카드를 가져갔고 나는 2년 동안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교로 전화가 왔다. 평소 거래하지도 않는 ♥♥은행에서. 통화를 끝낸 내 표정은 저승사자를 만나고 온 것 같았다. 날 더러 곧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했다. 남에게 돈 몇 만 원 빌려주고도 달라는 소리를 못하는 내가, 나도 모르는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책상 서랍에 처박아둔 은행 통장이 아니라 텅장을 찾아들고 택시를 탔다. 은행직원은 통장을 정리해서 보여줬다. 통장의 속지를 모두 채우고도 모자라 뒷면까지 빼곡히 들어찬 이름은 L부장의 남편이었다. L부장에게 준 카드가 어째서 그 남편에게 갔는지, 그가 왜 내 카드를 자기 것처럼 사용하고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처음 빌려 간 삼백만 원은 아예 갚은 적이 없었고 신용카드로 최대 지불 한도인 80만 원을 매달 갚았다 다시 쓰기를 2년동안 반복하고있었다. 원금 삼백만 원을 갚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이자도 넣지 않고. 은행직원은 고작 삼백만 원 때문에 내게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멍청한 데다 소심하기까지 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긴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 쓰다 보니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부장은 개뿔. 그냥 L이라고 해야겠다. L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묻자 별다른 사과도 설명도 없었다. 땅을 처분하기 위해 내놨으니 조만간 갚겠다며 한 달만 기다리라 했다. 삼억도 아닌 삼천도 아닌 삼백만 원인데.
멍청 ×2,000의 나는 또 기다렸다. 땅은 팔리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팔 땅이 있기나 했나 모르겠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우선 내 돈으로 은행 빚을 해결했다.
그녀는 온갖 핑계를 대며 돈 갚기를 차일피일 미루었고 나는 학교를 옮길 시기가 되었다. 그녀 눈엔 아무래도 내가 호구로 보였나 보다. 차라리 형편이 정말 곤란했다면 나는 그 돈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에 관해 들려오는 소문은 무성했고 그녀는 뻔뻔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그녀를 찾아가 교육청에 연락하겠다는 강한 언질과 함께 분할 납부라도 해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이자는커녕 내 돈 들여 택시 타고 가서 세 번에 걸쳐 삼백 만원을 받았다. 사과는 과수원에서나 찾아야 했다. 넌더리가 난다는 말뜻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아, 실명을 공개하고픈 충동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앙 다문다. 그런 L의 남편이 7년이 지나 교장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속 마음은 당장 그의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왜 그랬어, 넌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들뻔했어”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L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 멀리서 그가 보이면 가던 길도 돌아섰다. 참다못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사람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교장이 아는 척 한 의도는 ‘너 왜 알면서 내게 먼저 인사하지 않니’ 딱 그거였다. 어쩌라고.
‘아, 네~’ 내 대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국어 교사도 아닌 나는 책이 좋아서 학년 초 도서실 업무를 신청했다. 보통 도서실 업무는 국어 교사가 맡지만 새 학교의 도서실은 일이 많아서인지 손쉽게 내 차지가 되었다. 업무에는 교지편집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이미 3월에 이전 교장과 협의하여 만들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데 2학기에 온 그가 느닷없이 내게 교지를 만들라고 했다. 어렵다고 하자 그 후 교장은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도서실에 올라와서 내가 한 일도 아닌 것에 트집을 잡곤 했다.
그는 교장. 나는 일개 교사. 어찌 됐던 내 업무로 못 박혀 있으니 더 고집하면 무능력자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10월에 이름뿐인 교지 편집 위원을 구성하고 끙끙대며 작업을 시작했다. 24시간 수업에 도서관 업무를 하다 보면 학교에선 틈을 낼 수 없었다. 방학 중이지만 1월 말까지 혼자 작업을 마무리해서 인쇄하기 전 교감과 함께 교장실로 들고 갔다.
그가 대뜸 말했다. 서시가 이게 뭐냐고. 겨울을 꿋꿋이 이겨내는 보리밭을 소재로 한 시였다. 청소년에게 주는 시로 적합한 것 같아 넣었던 시다. 동료 교사들이 잘 골랐다고 했었다. 이 시인이 우리 학교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했다. 다음은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체육대회때 찍은 우리 학교 학생들의 웃는 모습이었다. 딴지 거는 이유가 있었다. 안 그래도 못 마땅한 내가 뻣뻣하게 구는 데다 그가 원한 인쇄소에 의뢰하지 않았으니까. 교장실 탁자에 원고 뭉치를 패대기치고 ‘니가 하세요.’하고 집으로 와 버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교지는 우여곡절 끝에 발행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든 교지 한 권이 내게 남아 있다. 그와 6개월을 근무하고 나는 학교를 옮겼다.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어찌 그와 내가 같은 학교에 머물 수 있겠는가. 난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 해에 교지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학교 신문으로 대체되었다.
그 부부를 보며 새삼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느꼈다. L에게 돈을 빌려준 몇몇 선생님이 제때 돌려받지 못해 고생했다는 이야기, 그들 부부의 기괴하고 납득되지 않는 행적들이 파다했다. 그럼에도 몇 년 뒤 L까지 승진하여 그들은 부부 교장이 되었다. L의 남편은 그 후 또 다른 흑역사를 남기고 퇴직했다. 지금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밤 왠지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