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우리 집 마당 위로 떼까마귀 수백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급히 휴대폰을 가지러 갔지만 늦었다. 새들은 이미 동네 앞 논바닥으로 내려앉은 뒤였다. 동네 어귀의 전깃줄에,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 앉은 까마귀 떼를 여러 차례 보았지만 이렇게 내 집 마당 위를 날아간 것은 처음이다. 귀한 장면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2000년대 초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담임으로 고입 시험 당일 새벽.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차로 이동 중이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는 지나치리만치 조용하고 약간 음산한 기운마저 돌았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태화강 부근의 동네를 지나는데 하늘 위를 뒤덮은 시커먼 구름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구름은 한 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흩뿌려지며, 검은 재가 되어 다시 하늘을 날았다. 승용차 위를 스쳐 전봇대에 앉는 검은 재는 까마귀였다. 너무나 충격적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 어슴푸레한 새벽하늘 위로 나는 수천 마리의 검은 새 떼는 히치콕의 공포 영화 ‘새’를 떠올리게 했고 그날 아침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오늘 아침 우리 동네를 찾은 새떼는 떼까마귀이다. 이동할 때 엄청나게 많은 수가 떼를 지어 이동한다고 해서 ‘떼까마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매년 겨울 울산을 찾는 철새로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겨울을 보내며, 그 수가 많을 때는 무려 10만 마리 이상이라고 한다.
떼까마귀가 울산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무렵이다. 수원시에 몰려드는 떼까마귀가 약 5,000마리로 추산되니 울산과는 가히 비교가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수의 떼까마귀 들은 왜 해마다 울산을 찾는 걸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한다. 몽골과 시베리아에서 여름을 나고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찾아드는 떼까마귀에게 울산의 포근한 기후는 의(衣)에 해당할 것이다.
떼까마귀 무리는 동이 트기 시작하면 먹이를 찾아 일제히 날아올라 반경 100∼130㎞ 이내인 경남 함양과 밀양, 경북 포항까지 간다. 가까운 울주군은 70%가 농경지라 까마귀에게 충분한 먹이(食)를 제공하는 곳이다. 또한 한 곳에 모여 자는 습성이 있는 떼까마귀에게 태화강변의 십리 대밭과 삼호동의 대숲은 따뜻하고 안전한 안식처(住)를 제공한다.
의·식·주가 한 곳에서 해결되니 이들에겐 겨울나기의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공업도시의 이면에서 태화강은 죽어 가고, 흐린 날은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의 공기가 뒤덮고 있던 곳이 울산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알면 알수록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 있다.
조류는 저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생태환경을 찾는다. 특히 월동 철새인 떼까마귀는 맑은 공기, 따뜻한 기온, 충분한 먹이, 포식자로부터 안전한 잠자리 등 좋은 서식 환경을 선택해서 찾아든다고 한다. 그러니 이들은 생태 환경 복원의 전도사가 되어 울산이 공해 도시의 오명을 벗고, 건강한 생태환경으로 변화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다.
몇 년 전 오빠 부부가 떼까마귀의 군무 사진 촬영을 위해 울산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까마귀가 모여들 시간에 맞추어 태화강 둔치로 나갔다.
낮동안 먹이를 찾아 외곽지역으로 떠났던 까마귀들은 해가 지면 태화강 십리 대밭으로 찾아든다. 하지만 곧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무리가 다 모일 때까지 공중을 맴돌며 저녁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해 질 녘 10여 분은 전체 떼까마귀가 모여 벌이는 군무의 절정을 감상할 수 있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면서 붉은 노을을 따라 한 무리씩 모여들었다.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펼쳐진 하늘 위로 떼까마귀의 화려한 군무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빛이 사그라지는 순간 사방에서 검은 무리가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검은 하늘, 검은 산을 배경으로 검은 새가 춤을 추었다. 우리는 검은 새떼의 황홀한 군무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처음엔 떼까마귀를 보는 울산 시민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숫자에 공포감을 느끼기도 하고. 특히 잠자리와 이동 동선에 있는 동네 주민들이 불편과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새 철새 체험 생태관광지로 외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내게도 그들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정겹게 인사를 나누는 겨울 손님이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까마귀들과 ‘안녕, 또 만났네’라든가 ‘아직도 자러 안 갔니?’라고 말을 건네본다.
최근 2~3년 전부터 울산을 찾는 떼까마귀의 개체수가 급감하여 올해는 4만여 마리로 줄어들었다. 러시아의 기후 온난화와 울산지역의 소 사료용 ‘곤포 사일리지’ 증가로 먹이가 줄어들어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