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유

by 도희

새해가 되자 주변 분들이 건강, 집 장만, 자녀 취업, 해외여행 등의 소망을 얘기하신다.

나 역시 올해 내가 하고 싶은 일,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잔병치레가 많은 내게 제일 중요한 건 건강이다.


반백년을 훌쩍 넘기고 보니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래서 나의 최우선 순위는 아프지 않기다. 올 한해 사람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다음은 퇴직하고 쉴 만큼 쉬었으니 미약하나마 다른 사람의 삶도 돌아보는 일을 하고 싶다.


또 하나가 글쓰기다. 이왕 시작했으니 뭐가 됐던 지치지 않고 꾸준히 써 볼 일이다.


작년 한해를 돌아보며 몇가지 일들을 반추하고 새롭게 다가올 나의 시간을 그려보았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넘나들다보니 문득 ‘꿈’이란 단어에 생각이 닿았다.


내 어릴 적 남자아이들은 보통 대통령, 장군, 과학자, 의사가 꿈이라 했다. 여자애들은 간호사, 선생님, 공무원 가끔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현모양처라는 애도 있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초등학교 때 딱히 뭐가 되고 싶었다는 기억이 없다.

중1 국어시간이었다. 눈망울이 또렷한 짧은 커트머리의 여선생님이었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을 하는 요즘 말로 차도녀 스타일이다. 선생님은 5일이면 5번 15번 이런 식으로 책 읽기를 시키셨다. 내 차례가 되어 책 읽기를 마쳤을 때다.

“너 목소리 좋구나. 아나운서 하면 딱 좋겠다.”라고 하셨다. 여태껏 들어 보지 못한 칭찬이었다. 시크한 그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 후 국어 선생님은 시를 낭송하거나 특별한 내용을 읽어야 할 때 종종 내게 그 기회를 주셨다.


도덕시간, 사회시간에도 선생님들은 단골로 책 읽기를 시키셨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 목소리를 들어 볼 기회가 없으니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 없었다. 그저 발음이 또박또박하다는 정도였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꿈은 신기루에 가까웠다. 뒷바라지를 기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 억센 서부경남 사투리는 핑계였는지 모른다. 사실은 무엇보다 촌스러운 외모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라디오 아나운서도 있었는데 말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국어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고 1 담임 선생님 과목이 국어였다. 총각 선생님으로 등단까지 하신 소설가였다. 그때만 해도 책 읽기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라 선생님이 더 멋져 보였다.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했고, 국어만큼은 전교에서 상위권을 다투었다. 자연스레 글쓰기와 관련된 작가나, 기자가 되고 싶었다. 2학년이 되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였다. 당시는 상과반과 인문반이 합쳐진 종합고등학교였다.

입학하던 그 해. 고향의 재일동포 몇 분이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지역 인재가 부산이나 마산, 진주 등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성적순대로 50명에게 3년간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 형편도 아니었다.

퇴직하시고 고향으로 이사 오신 부모님껜 달리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다. 작은 집과 겨우 양식할 만큼의 논과 밭뙈기를 장만한 게 전부였다. 당장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현금이 나올 곳이 없었다. 철이 없던 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매사에 의욕을 잃어 갔다. 대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자 공부는 커녕 틈만 나면 운동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나무와 하늘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막내라서 그런지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다. 악착같이 공부했다면 다른 길이 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미리부터 절망하고 걸핏하면 울기나 했다. 3학년 2학기 원서접수 기간이 다가왔다. 다행히 두 오빠의 도움으로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빠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언니들 덕분에 막내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집안 형편을 고려한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지방 국립대 사범대학으로 진학했다. 국립 사대는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자격증이 주어졌다. 요즘처럼 임용고사가 없었다. 교사로 발령받아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 숨 가쁘게 달렸다. 출산 휴가 2달, 병가 1달을 제외하곤 육아 휴직도 없이 줄곧 앞만 보고 고지식하게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아플 때 곁을 지켜 주지 못했고 부모참관 수업, 운동회, 입학식, 졸업식도 거의 함께 하지 못했다. 제일 후회되는 일이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갈 것이다.

공립학교는 4~5년마다 근무지 이동이 있다. 사정상 만기를 채우지 못한 학교도 있었다. 9개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니 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비록 어릴 적부터 품어 온 꿈은 아니었지만 교직에 발을 디딘 후부터 교사가 천직이라 여겼다. 교사 아닌 삶은 생각조차 못할 만큼 내 깐에는 열심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후 친하게 지낸 젊은 선생님들이 학교 생각 많이 나지 않냐고, 허전하지 않냐고 물었다. 이상하리 만치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최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을 짓고 이사를 하느라 2년이 훌쩍 지났다.


사범대학에 진학한 후부터 직업이 예정되어 있다 보니 다른 길은 생각도 못해 봤다. 원래 나는 호기심이나 모험심이 적은 편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도 꺼린다. 그러다 보니 익숙함에 젖어 꿈은 잊은 지 오래였다. 퇴직 후의 생활에 적응이 되고 마음의 여유를 찾자 슬그머니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내 집에 찾아온 길고양이들이 너무 귀엽고 신기해 그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일기 같은 글을 끄적이면서 차츰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가슴속에 묻어 둔 추억 노트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 잊고 있었던 작가나 기자가 되고 싶다던 꿈이 떠 올랐다. 글쓰기가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생각이 깊어졌다.

잊고 산 것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떠 올랐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사물의 속삭임을 들여다본다. 언젠가가 될지 모르지만 내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의 상처들을 글로 어루만질 날도 올 것이다.

바삐산다는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며 꿈조차 꾸지 못했던 삶이라고 나 자신을 타박하지 않는다.

그대신 이제라도 살포시 꿈 하나를 품는다.

나의 꿈은 자유롭다.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랴.

별 같은 꿈. 별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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