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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재 Feb 18. 2022

아내의 비자금

궁금한 남편

자려고 누웠는데 남편 왈 '당신 비자금이 짭잘 할 거 같은데...' 이 달에 여러 번 듣던 말이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침을 삼켰다. 남편의 궁금함이 극에 달했나 보다.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두 딸을 가르치기 위해 옆 집에 사는 같은 학년 형제를 가르쳤다. 그전에 옆집에 사는 중학생을 가르치기는 했는데 이사 가는 바람에 두 달 정도로 끝났다. 부모가 중국집을 시내에서 하기 때문에 부모가 귀가할 때까지 봐주는 것으로 중학교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몇 명 부모들이 와서 끊임없이 했다. 학원비로 받았던 과외비는 집안이 어렵다고 못 내고 결국은 그만두기까지 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다.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이 과외를 양지로 꺼내어 집에 '영어 중등 교사자격증'을 걸어놓고 과외를 하던 시기도 지난다. 당시 버는 돈은 생활비, 교회에 사용하는 돈, 공부하는데 들어가는 돈으로 분배되었다.

딸의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줘서 부모교육을 받게 되고, 부모교육강사로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 후 청소년 전공도 하고 가족상담으로 대학원을 다니면서 초중고로 '게임과몰입' 강의 다니고 부모교육을 하였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 돈으로 대학원을 다녔다. 과외선생을 하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게 되고,  '효과적인 부모역할'을 강의하면서 사는 보람을 느꼈다. 


대학원 졸업여행 갈 때 대학원 다닌 것을 알았던 남편이다. 늘 바빴기에 대학원 다닌 줄 모르고 강의 다닌 줄 안 것이다. 가끔 돈이 모이면 남편의 양복, 외투, 옷들을 사주었고 이사할 때는 가구를 샀다. 그러면서 남편은 가끔 비자금에 대해서 물어보고 궁금해했으나 못 들은 척 그냥 침묵했다.  고용센터에서 '심리안정실'을 다니며 벌은 돈은 남편이 맹장, 허리 수술하면서 사업을 쉬게 되었을 때   생활비로 사용되었다.  벌은 돈은 계속 재투자되었으니 별로 남은 것은 없지만, 그 돈은 내 숨을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돈은 성지순례를 가게 해주었고, 친정엄마에게 작은 용돈을, 동생이 아플때 줄 수 있는 돈이 되었다.

  

일단 계속 경제활동을 했으니 남편은 궁금하겠지. 내가 친구 만나거나 모임에 갈 때 회비도 준다. 파마할 때도 준다. 큰 옷을 살 때도 준다. 내가 버는 돈은 미약하니 남편이 궁금해하는 것은 단지 그 액수가 얼마나 되는가 통장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 알 것도 같다. 그래서 그다음 날 아침 그냥 통장을 보라고 주었다. 당황하듯 잠시 멈칫했으나 자연스러운 듯 받았다. 그리고 쓱 눈으로 훑어보는 것 같았는데 가서 '통장정리가 덜 되었다며 정리된 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생각보다 작은 돈에 실망하였는지, 통장을 봤다는 것에 만족하였는지 편안한 얼굴이었다. 


신혼 때 회사 선배가 돈 빌려달라고 전화 왔는데 '돈 없다'라고 했더니 '넌 비자금도 없이 왜 사니?'. 그 후 나는 비자금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 것 같다. '늙으면 남편보다 돈이 더 의지가 된다'는 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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