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람하는 가짜에 대한 독단적인 단상을 적다
바야흐로, 스펙의 인플레 시대를 지나 스펙의 과대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스펙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닐지,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취업시장에서 그들의 딜레마가 만들어낸 오버스펙의 대범람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된 ‘스펙’의 기준이 나름대로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허상처럼 비난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세대들에게는 기초적인 바이블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상기한 것처럼, 스스로가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스펙은 지속적으로 상승작용 해왔고, 생각건대 최악의 스펙 범람 시대가 도래했다고 본다. 이제는 어설픈 스펙은 스펙으로 치부받기도 어려운 시대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스펙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입장의 역사이며, 실질 취업시장에서의 스펙 대우는 많이금 변화해왔다. 한 번쯤은 경험해보았을 내용으로,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단순 노동이든, 사무이든, 기술적 요소이든 간에 개인의 ‘능력’과 ‘스펙’의 괴리는 지속적으로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괴리 속에서도 ‘스펙’만큼 명확하게 개인이 이루어 낸 성과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고, 노력한 역사를 측정할 수 있는 대안의 제시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블라인드 채용을 논하고 체계적인 심층면접의 도입이 이루어지고 지속적으로 확대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취업시장에 속해있는 모두가 지쳐버린 것은 아닐까. 언제나 절대적인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라고 논해지는 것들도 반드시 선(善)한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의 니즈와 원츠에 따라서 상호간의 적절한 인정선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각설하고, 취업시장의 변천과는 별개로 이미 범람된 개인의 스펙이 남긴 공포감은 이미 세대를 초월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은 청소년 또는 청년 세대에게 폭력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공포는 필연적으로 답습된 딜레마를 낳으며, 그것은 가장 가깝게는 입시, 대학에서의 학점, 전문자격사, 대외활동 및 경력, 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벗아나 차별화되는 개인의 커리어 등 직관적이면서도 가장 소모적인 시장으로 세대를 몰아넣었다. 과정 속에서 파생된 파편들은 지금 사회의 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기존의 스펙의 틀을 깨고 개인을 어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전문성’과 같은 키워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파생된 효과는 각종 직업, 직군의 허들을 낮추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이 이루어낸 정보의 대범람은 성역화됐던 기술이나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매우 쉽고 용이하게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개인들은 범주화된 성역 외부에서의 개인활동을 쉽게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글을 적는 지금 역시, 필자의 생각은 오만하고 경솔한 발언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개인’들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가짜’들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정보를 전달한다는 미명 아래 사명의식 없는 가짜 언론인, 가짜 뉴스들이 온라인을 뒤덮기 시작했고 그것은 배우, 감독, 기자, 작가, 시인, 모델, 유튜버, 스트리머, 분야별 전문가, 칼럼니스트, 또는 언급되지 않은 수 많은 영역 속에서 ‘가짜 스펙’을 양산해내고 있다. 그리고 ‘가짜’들은 개인의 SNS와 온라인 속에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N’번 째 가짜로 세상을 잠식하고 있다.
필자가 짚고 싶은 단상은 단순하다. 100중의 N은 범주화된 세계의 바깥에서도 스스로의 역량과 가치를 분명히 키워내왔고, 성공해왔을 것이며, 그러나 노력하다가도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만들어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들어 나갈’ 나를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성공한 개인이 됐을 수도, 실패하여 스러진 개인이 됐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절대다수의 팽창을 두고 논하는 것처럼 보이는 필자의 글에는 많은 한계가 있고 지적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존재한다고 본다. 개인이 무엇을 위하든 그 가치의 상하한선을 정하거나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아가는 길이 지향하는, 그 가치에 대한 출발선만큼은 분명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