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테나 Aug 23. 2017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 <더 테이블>

영화 <더 테이블>  리뷰

먼저, 곱게 간 커피를 압착시켜, 기계로 흙갈색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과 약간의 물을 넣고, 에스프레소를 부어 저어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만들어진다. 차가운 얼음과 어우러진 향기로운 다갈색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는, 때로는 쌉싸름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진하지 않은 맛과 향으로 여름의 목마름을 해결해 준다. 왜 나는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을 보고,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떠올렸을까?


영화의 주된 공간은,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아담한 카페의 창가 테이블이다. 시간 별로 그곳을 찾는 네 명의 여주인공들과 그녀들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그곳에서 4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카페'라는 영화의 공간적 제약은, 오히려 만남을 갖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과 섬세한 감정 변화 속으로 관객들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작은 소품들은, 인물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영화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재미를 던져준다.


오전 11시 : 스타 배우가 된 유진과, 옛 남자 친구 창석.

배우 유진은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하면서까지, 낯선 카페로 옛 남자 친구 창석을 만나러 온다. 하지만, 옛 남자 친구 창석은 자신이 잘 나가는 여배우와 사귀었던 사람이라는 증거를 남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진을 찍고, 찌라시 가십 이야기를 확인하는 지질한 모습의 창석을 보며 유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진은 적잖이 어이없어하면서도, 곧 드라마에 나올 예정이니 잘 봐달라며 훈훈하게 자리를 마무리한다. 옛 연인이 아니라, 팬미팅을 끝낸 여배우의 모습으로 돌아간 유진은, 옛 남자 친구 앞에서 벗었던 선글라스마스크 다시 자신의 얼굴을 감춘다. 두 사람의 사연이 드러나는 동안 카메라는, 답답할 정도로 극단적인 클로즈 업 샷을 반복하며 정서적 소통 불능의 느낌을  강조한다. 아마도, 험난한 연예계에서 진하고 쓴 에스프레소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유진과, 가볍게 취하기 좋은 맥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창석은,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문장처럼,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나 많이 변했어!"라는 유진의 대사처럼, 사랑의 특별함이 사라져 버린 옛 연인의 모습은, 멀어져 버린 마음과, 달라져 버린 생각, 치졸한 삶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후 2시 반 :  3번 만난 하룻밤 사랑. 5개월 만에 재회하는 경진과 민호.

세계여행을 떠난 후로 몇 달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민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앉아있는 경진.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며 실없는 말들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민호와 달리, 왜 경진은 그의 시선을 피할까? 민호가 경진의 집에 두고 간 시계를 돌려주며 민호와 만났던 지난 시간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건가? 하지만, 민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의 어색한 관계를 풀고 싶은 듯, 그녀가 일어나 가려고 할 때마다 "경진 씨, 저 잘 모르시잖아요!" 라며 그녀를 붙잡는다. 조심스럽게, 체코에서 사 온 중고 시계를 그녀 팔목에 채워주는 민호. 세계여행 중, 그녀를 생각하며 샀던 엉뚱한 물건들을 꺼내며, 경진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다.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민호의 진심이 느껴져서 일까? 경진은 어느새, 민호가 선물한 중고 시계를 보며 미소 짓는다. 마음이 통하며, 멈춰 있던 사랑의 달콤한 시간을 다시 이어가게 된, 이 커플의 테이블에는 인생처럼 씁쓸한 두 잔의 같은 커피와, 커피의 쓴맛을 조금은 달콤하게 녹여 줄, 초코무스케이크 놓여 있다.


오후 5시 :  결혼 사기로 만난 가짜 모녀 은희와 숙자

카페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수상하다. 엄마뻘쯤 되어 보이는 숙자에게 자신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은희. 숙자는 안경까지 꺼내 쓰고, 그녀의 이야기를 수첩에 적는다. 결혼 사기를 치며 살아왔던 은희의 진짜 결혼식에, 돌아가신 엄마 대신 가짜 엄마 역할을 할, 숙자가 만나고 있는 중이다. 숙자에게 자신의 진짜 엄마 이름과, 집에서 불리던 거북이라는 별명을 알려주는 은희. 숙자는 죽은 딸의 결혼식 날자와 같은 날 결혼하는 은희를 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을 떠올린다. 진짜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것이라며 이번엔 혼인신고도 할 생각이라는 은희의 말을 들은 숙자는 자신의 가짜 역할을 기록하기 위해 쓴 안경수첩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은희가 거북이처럼 느리긴 해도, 게으른 건 아니니 예쁘게 잘 봐달라'는 시부모님께 전할 당부의 말을, 미리 연습이라도 하는 듯, 따뜻한 목소리로 은희에게 이야기해 준다. 촉촉한 눈빛이 되어 "잘하셨어요!"라고 천천히 답하는 은희. 그녀의 진심은 무엇일까? 그 들이 떠나고 난 테이블 위엔, 그들이 마신 두 잔의 카페 라떼 똑같이, 거품이 사라진 채, 본연의 라떼 색깔로 남아 있다.


오후 9시 :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혜경과 이별을 선택하는 운철.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카페 유리창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 혜경. 카페 안, 테이블에 앉아 컵에 담긴 흰 꽃잎을 뜯으며 운철이 그녀를 바라본다. 맑고 붉은 홍차처럼 솔직하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혜경은, 운철이 뜯어 놓은 꽃잎을 물컵 속에 다시 담아 띄우며, 운철이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파혼하고 돌아가겠다고 한다. 씁쓸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던 운철은 그런 혜경이 부담스러운 듯 "나, 혜경 씨 못 먹여 살려!"라며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거절하고, 결국, 둘은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카페를 나서며, 각자의 길로 헤어져야 하는 순간, 운철은 혜경을 향한 자신의 진심을 넋두리처럼 내비치지만,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혜경은 차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운철의 마지막 미련마저 쿨하게 끊어낸다.


늦은 밤. 하루 동안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카페에 불이 꺼지고 난 거리엔,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을 떠오르게 하는 붉은 꽃이 떨어져 있다.



영화 <더 테이블> 앞에는 "마음이 지나가는 곳"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아마도 감독은 이 카페서 만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머물다 갔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엔 쓸데없는 말들과 가식적인 행동이 섞여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 욕망이나 정서적 느낌은 꽤나 잘 드러나고 있다.


유진을 만난 창석은 인증샷을 찍어달라며 대놓고 과시욕을 폭발시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경진을 붙잡는 민호는 핵심에서 벗어난 대화보다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행동으로 경진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또, 은희에게서 딸 같은 느낌을 받은 숙자는, 시어머니께 딸을 당부하는 말로, 죽은 딸에게 전하지 못한 어머니로서의 애틋한 마음을 직접 표현하고 있으며, 혜경 앞에서 시종일관 소극적으로 보였던 운철 또한, 선택의 순간에선 이별의 이유를 명확히 제시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나야 하는 4명의 여주인공들의 정서와 마음은, 비밀을 숨겨놓은 듯 매우 절제되어 표현된다. 옛 남자 친구의 어이없는 태도에 잠시 상처받은 듯했던 유진은, 큰 표정 변화 없이 무난히 그 자리를 마무리하며 떠나고, 숙자의 따뜻한 말에 위로를 받은 듯했던, 촉촉한 눈빛의 은희도, 차분하게 "잘 하셨어요!"라고 답 할 뿐, 다른 반응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시종일관 운철과의 사랑을 되돌리고자 했던 혜경은, 진짜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선, 쿨하게 관계를 마무리하는 변화된 태도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으며, 4명의 여주인공 중, 가장 명확한 미소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 낸 경진은, 그 변화가 너무 명확해서, 오히려 미소 짓기 전, 민호의 시선을 피하던 상황에 대한 모호한 설정과 그 심리적 변화에 대해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답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어쩌면, 여주인공의 절제된 정서적 표현들은, 그녀들의 숨겨진 마음을 더 깊이 생각해보라는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4가지 에피소드 시작 부분에서, 항상 여주인공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배우의 뒷모습은 영화 속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쇼트이기 때문에, 더욱 의도적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숨겨진 뒷모습, 그 낯선 뒷모습 속에 감춰진 그녀들의 진짜 마음을 생각해 보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창석의 과시욕을 바라보는 유진의 심정은 어땠을까?' '경진은 진짜, 중고 시계에 담긴 의미만으로, 민호에 대한 서운함이 다 풀렸을까?' '숙자의 진심 어린 말에서 눈빛이 촉촉이 젖은 채, 아무렇지 않게 잘하셨다고 말하는 은희가 숨기고 있는 진심은 무엇일까?' '그렇게 사랑을 되돌리고 싶어 하던 혜경은 어떻게 그렇게 쿨하게 이별할 수 있는 걸까?' 감독이 비밀처럼 숨겨 놓은 영화 속 질문들은, 각각 인물들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확장시키고, 관객들에겐 영화 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4명의 여주인공들이 앉아 있던 빈 의자를 보여주며, 다시 한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떠난 주인공들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키며 마무리된다. 관객들이 풍성하고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처럼, 아마도 영화를 본 관객들은 각자의 생각과 느낌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 속에 답이 무엇이 되었건, 여기 등장한 4명의 여주인공들이 마주한 삶의 한 단면들은, 향기롭지만 씁쓸한 커피와 매우 닮아 있다. 좋은 기억으로 옛 남자 친구를 보러 왔던 유진은 어이없게도, 과시의 도구가 되어버렸고,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에겐 불안한 현실이 남아 있게 된다. 또, 진심과 위로를 나눈 상대는 거짓으로 만들어진 관계에 지나지 않으며, 사랑의 진심은 현실에서 이별로 끝을 내기 일수이다.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모든 에피소드는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작은 실망과, 불안, 후회와, 고민을 담아내며, 향기롭지만 씁쓸한 맛의 커피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 속 공간이 카페이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떠올린 이미지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먹음직한 다갈색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이다. 얼음물로 희석되어 진한 풍미는 덜하지만, 즐길 수 있을 만큼의 향이 느껴지고, 때론 씁쓸하게, 때론 달콤하게 즐길 수 있는, 깔끔한 매력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는, 인생의 씁쓸한 맛을 고운 화면과 풍성한 이야기로 깔끔하게 풀어낸, 영화 <더 테이블>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느낀 <더 테이블>은 어떤 맛이었는지...

이 순간! 오감을 열고,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냉장고 속엔 머리! 얼어붙은 강 밑바닥엔 가슴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