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리뷰
어떻게 보면, 참 전형적인 영화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90년대 말에서 2000년 초반을 강타했던 <러브레터>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일본 멜로 영화를 그대로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과, 교복과 학교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향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라는 잊을 수 없는 경험과, 불치병이나 사고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눈물 코드, 죽은 첫사랑의 흔적을, 시간이 한 참 흐른 뒤에서야 찾는다는 이야기 구조 등은, 슬픈 일본 멜로의 전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파격적인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는, 전형적이랄까, 복고적이랄까, 어쩌면, 촌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원래 '스미노 요루'의 인터넷 소설로, 2016년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다. 영화로 만들어져 지난여름, 일본에서 크게 흥행했으며, 내년엔 애니메이션까지 개봉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본에서 이 이야기는 초대박 콘텐츠로, 끝 모를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련되지도, 신선하지도 않은, 90년대 말의 감성으로 회귀하는 듯한 이 이야기가 왜 지금, 일본에서 흥행하고 있는 걸까?
영화를 보며 시종일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불안'과 '관계'라는 키워드, 그리고 20세기 말에 유행했던 아름답지만 슬픈, 일본 멜로 영화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1999년 개봉한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일본 영화들은, 죽음을 소재로 한 슬픈 멜로 거나, <링> 시리즈, <검은 물 밑에서> 등과 같은 공포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을 세기말적 상황으로 해석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의 불안과 공포는 세기말적 상황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7,80년대 고도성장을 거듭하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1990년대 초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건물 가격이 1/4 수준으로 폭락하고,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위기는 10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후에, 일본은 이 시기를 '경제성장률 0 시대', 또는 '잃어버린 10년'이라 일컽게 된다. 특히,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수년 동안 계속된 일본의 경제 불황에, 세기말적 상황까지 겹치면서, 일본인들의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한 영화들이,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전면에 내세워, 불안을 소비시키는 호러 공포 영화들이거나, 좋았던 지난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며, 학창 시절의 첫사랑과 죽음의 코드를 결합시킨 슬픈 멜로 영화들이었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울고 싶을 때, 뺨 때리는' 전략적 선택에 의한 성공작들인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절, 그 영화들의 불안과 공포가, 2017년 지금, 이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드러나고 있다.
밝은 웃음이 매력 있는 인기 만점의 여고생 '사쿠라'는 췌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우연히 병원에서 친하지도 않은 클래스메이트 '시가'에게 자신의 병을 들키게 된 후,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도서위원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 없는, '자발적 외톨이'였던 시가는 사쿠라가 신경 쓰여서, 그녀에게 묻는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냐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못했던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자 사쿠라가 대답한다.
나의 하루의 가치와
너의 하루의 가치는 똑같아.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사쿠라의 말속엔 일본 사회의 불안이 스며들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지만, 자신처럼 몇 년 안에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당장 내일 교통사고나 묻지 마 살인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가치는 누구에게나 소중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지만, 영화 속 중심 갈등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의 코드가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은 표면적인 뜻으로만 보면, 매우 엽기적인 내용이지만, 영화적 맥락으로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매우 독특한 마음의 고백이 된다. 특히 이 말은 "누군가가,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으면, 그 신체 일부를 제공한 사람은, 누군가의 몸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속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난 네가 되고 싶어!" "난 네 속에 살고 싶어"라는 말과 함께 쓰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은, 누군가와 절때 떨어지지 않을 완전한 관계, 또는 사랑의 완성을 꿈꾸는, 진실한 고백의 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한 단계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자신의 부족함과 존재의 불안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 될 수도 있다. 시가가 사쿠라에게 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고백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쿠라를 부러워하는, 시가의 숨겨진 마음속 고백으로 읽힐 수 있고, 사쿠라가 시가에게 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은, 자신을 지킬 용기와 건강한 생명력이 없는 자신의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런 생명력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의 불안은 이야기 속에서 서로의 이름이 제대로 불려지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사쿠라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많이 불려지지만, 시가는 한 번도 사쿠라의 이름을 그녀 앞에서 부른 적이 없다. 시가의 이름 또한, 시가라는 성(姓)으로만 불릴 뿐, 영화의 주된 시공간이 되는 학창 시절 이야기 속에선, 제대로 된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 일본에서는 친하지 않으면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른다고 한다 - 사쿠라 역시 "네 이름은 소설가 이름을 섞어 놓은 것 같다"는 얘기만 할 뿐,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나 '너'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진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은 그 사람을 부르는 가장 정확한 명칭이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가의 이름이 제대로 불려지지 않고, 시가도 친구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 영화적 설정은, 일본의 뿌리 깊은 개인주의 캐릭터로서 '자발적 외톨이'인 시가의 관계 인식이 매우 서툴며, 그 자신에 대한 사회적 존재감 역시도 매우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드러난 일본인들의 존재적 불안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은 세기말의 상황도 아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전보다 나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일본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 바탕엔, 화산 폭발과 지진, 태풍 등의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 같은 지리적, 불안 요소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권혁태의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는 책에서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망의 결과로, 전쟁과 군대를 포기하는 평화 헌법을 제정하면서, 미국에 의존하는 '안보에 대한 불안'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이 자국의 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을까, 한반도 분쟁에 말려들진 않을까, 북한으로부터 공격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나, 최근 일본의 국제 정세를 보면,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무조건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태도 때문에, 세계적인 눈총을 받기도 했고, 영토 다툼을 벌이기도 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와 불편한 관계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또, 핵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북한은 ICBM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미국과 설전을 벌이고 있으니, 일본의 안보 불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이번 북한 상황을 계기로 자위권을 획득하고, 세력의 입지를 넓히려는 우경화된 일본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는커녕, 북한 상황을 부풀리고 있기까지 하니, 일본이 세기말적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존재적 불안에 떨고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 작가가 제시한 해결책은 '관계 맺기'이다. 처음,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불안에 대한 인식보다 먼저 든 생각이, '관계 맺기에 관한 이야기군!'이었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작가가 곳곳에 숨겨 놓은,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의미와, 과정, 그 상징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여자 주인공 사쿠라는 특유의 친근함으로, 학교에서 관계 맺기에 서투른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인기 있는 여고생이다. 밝게 웃는 귀여운 외모에, 소심한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싹싹함, 불치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친구들에게 티 내지 않는 속 깊은 마음의 사쿠라는 어쩌면, 개인주의가 만연한 일본 사회에서 관계 맺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일본 남성들의 판타지일 것이다. 그런 그녀는 '모든 것은 우연과 운명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한 의지'임을 강조하며 새롭게 친해진 클래스메이트 시가 군이 자신의 단짝 친구 쿄코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내 친구가 되어 줄래?"라는 말을 연습시킨다. 시가는 사쿠라에 의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는 방법과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하나씩 배우면서 '자발적 외톨이'를 벗어나게 된다.
시가의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는 매우 사소하지만, 재미있다. 영화 중반, 사쿠라 덕분에 친구들의 관심 대상이 된 시가에게 한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처음으로 반 친구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라는 시가. 그 친구가 작은 호의(好意)로 건넨 껌을 처음엔 받지 못하지만, 사쿠라와 알아가며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워가면서, 나중엔 그 친구가 건넨 껌을 받는 변화를 보인다. 시가의 변화에 이번엔 그 친구가 오히려 놀란다.
또, 사쿠라가 시가에게 처음 빌려주는 책,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통찰로 유명한 고전이다. 이 책은 나중에, 사쿠라가 도서관에 자신의 유언장을 숨겨 놓는 책으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중간중간 영화에 등장할 때마다, 사쿠라가 그려 놓은 함빡 웃는 모습의 이모티콘 낙서가, 사쿠라의 미소를 떠오르게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도, 작가가 생각한,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대한 중요성과 그것의 기분 좋은 느낌을 <어린 왕자>라는 책과 그 뒤에 그려진 웃음 이모티콘을 통해 전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시가의 완전한 이름은, 사쿠라가 숨겨 놓은 <어린 왕자> 속, 유언장이 발견되는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게 된다. '소설가의 이름을 합친 것 같다'는 사쿠라의 힌트처럼, 그의 이름은 "시가 하루키"다. - 일본 소설가 시가 나오야 + 무라카미 하루키 - 그리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12년 전, 사쿠라가 남긴 유언장을 읽던 시가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 나간다. 결혼식을 앞둔 사쿠라의 단짝, 쿄코에게, 숨차게 달려가서 건넨, 그의 한마디는, "내 친구가 되어 줄래?"였다. 사쿠라는 죽고 난 후까지, 타인으로 떠도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둘을 연결해주며, 두 사람의 존재적 불안이 관계 맺기를 통해 극복될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가 존재적 불안의 대안으로, 관계 맺기를 제시하고 있다는 가장 결정적 근거는, 병원에서 나누는 시가와 사쿠라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사쿠라에게 시가가 묻는다.
너에게 있어... 산다는 건 어떤 거야?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일 아닐까?
누군가를 인정하고, 싫어하고,
누구 때문에 즐겁고, 짜증 나고...
누군가를 껴안고, 스쳐 지나가고...
혼자 있다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어!
남과의 관계들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아!
...
너와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네가 선사해 주는 일상이 내게는 보물이야!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사는, 작가가 소설 전체를 통해 하고싶어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듯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만 삶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보물과 같은 것이니, 삶의 모든 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어선 안된다. 의지를 가지고, 씩씩하게, 관계 맺기를 해 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존재의 불안을 잠재우고, 삶이라는 시간을 보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방법이다."
어떤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영화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다. 2017년 일본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속에는 일본인들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향수, 슬픔의 정서가 녹아있다. 20세기 말에 유행했던, 이런 복고풍의 슬픈 멜로 영화가 일본에서 다시 흥행하게 된 데에는, 현재 일본 사회의 불안감과, 개인주의적 환경이 주는 외로움에 공감하고, 순수한 사랑과, 절대 깨지지 않을 완벽한 관계를 바라는 일본인들의 열망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선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불안과 외로움, 순수한 사랑과 완벽한 관계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까? 감정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겐 눈물과 풋풋한 정서가 만족스럽겠지만, 새로운 이야기와 아름다운 화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불만족스러울 수 있으며, 영화를 통해 인생의 작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의미있는 대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철학적 깊이를 진하게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겐 조금 가벼울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즐기는 자의 몫이다! 이제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 영화와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관계를 맺게될까? 궁금하다.
대사 발췌 부분 등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