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보이 인 뉴욕> 리뷰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배경이 되는 장소가 중요한 영화들이 있다. 다른 곳에선 느낄 수 없는, 그 장소만의 독특한 정서와 느낌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만들거나, 그곳에서 자주 일어날 것만 같은 일과, 그곳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인물을 창조해서, 배경 속 공간의 은밀한 특성을 인상적으로 표현해 내는... 그 공간 속에 깊숙이 감춰진 속살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영화 말이다.
이 영화 <리빙 보이 인 뉴욕>처럼...
미백색 화면 위, 4B 연필로 그림을 그리듯 뉴욕 거리와 빌딩들,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 위로, 중년 남성, 제랄드(제프 브리지스)의 걸쭉한 목소리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설명한다. 제랄드는 이 영화 속에서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이라는 영화 제목과 같은 소설을 쓴 작가로 나온다. 마치 소설의 시작 부분을 읽는 듯, 배경이 되는 뉴욕과, 주인공 토마스(칼럼 터너)와 그가 좋아하는 미미(키어시 클레몬스)의 관계를 설명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주인공 토마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이 영혼을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더 이상 핫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청년이다. 작가를 꿈꾸지만, 성공한 출판사 사장인 아버지(피어스 브로스넌)의 은근한 반대에 밀려, 자신의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자 친구가 있는 미미를 사랑한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소설가 제랄드는 첫날부터 토마스의 상담자를 자청하고, 토마스는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자신의 글을 보여주기도 하며 친해진다. 우연히, 아버지가 미모의 조한나(케이트 베킨세일)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신경쇠약의 어머니(신시아 닉슨)를 위해 조한나를 아버지에게서 떼어 놓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아들의 삼각관계 속에서 조한나는 결국 아버지를 선택하고,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토마스는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밝힌다. 토마스의 상담자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밀스러운 인물, 제랄드는 이 이야기를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라는 소설로 쓰게 되고, 토마스가 몰랐던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다.
이 영화의 홍보 콘셉트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뉴욕의 촉촉한 감수성 멜로에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영화 자체의 성격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영화는 뉴욕에 대한 도시 설명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는 토마스의 성장 멜로인 듯 보였다가, 아버지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는 치정 멜로로 발전하고, 나중엔 가족 해체의 위기를 다룬 드라마로 갈등을 폭발시킨 후, 토마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성장 드라마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다양하게 변화하는 이야기 성격과 사건의 전개가 매우 흥미로우며, 중간중간 보이는 뉴욕의 다양한 도시 풍경과, 공원 숲 인서트들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뉴욕의 느낌을 전달하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야기 마지막에 드러나는 감춰진 진실은, '토마스의 성장영화'라는 영화 정체성에 정점을 찍으며, 뉴욕이라는 도시에 어울릴만한, 희극이면서도 비극인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인생은 계획적이지만,
예상할 수 없고,
희극이면서 비극이지!
- 제랄드의 대사 중에서 -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뉴욕은 영혼을 잃었다"는 토마스의 말처럼, 모두들 자신의 진심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토마스의 엄마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랑을 가슴 한쪽에 숨겨 놓은 채, 평생 완벽한 가정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세상의 눈치를 보며, 조한나를 향한 사랑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아들에게는 완벽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조한나는 토마스와 토마스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나중에서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토마스가 좋아하던 미미 또한, 남자 친구와 토마스 사이에서 헤매다 토마스의 마음이 조한나를 향할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고 나서야 토마스에게 다가선다.
몰론, 자신의 진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 토마스가 가장 결정적이다. 글을 쓰고 싶지만, 토마스의 글을 그저 "봐줄만하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의사 표현 한 번 못하고 꿈을 접은 토마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또, 조한나를 미행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애욕이 숨어 있다는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친구의 결혼식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조한나의 말처럼 토마스는 "혼란스럽고 어리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혼란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의 충고처럼, 부딪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토마스의 부딪쳐 해결하는 소년다운 용기 덕에, 아버지는 과감하게 조한나와의 관계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고, 조한나는 토마스 아버지를 진정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신경쇠약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어머니 조차, 감춰 두었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꺼내보게 된다. 덕분에 알게 된 가족의 비밀은 결정적으로, 토마스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고, 가족의 해체는 비극적이지만, 각자의 인물들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스스로 찾아가게 됨으로써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라는 원제목처럼, 영혼이 죽어버린 도시, 뉴욕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소년 토마스의 성장 드라마로서 완결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깊이감 있는 그 무엇인가가 이 영화엔 더 있다. 그것의 힌트가 된 것은, 감독이 보여주는 "영혼을 잃어버린 도시 뉴욕"의 무겁고 활력이 사라진 느낌의 톤 다운된 도시 풍경 인서트들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빽빽한 건물들과 화려한 불빛을 자랑하는 뉴욕의 밤 풍경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어두운 밤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보여지고, 색색의 화려함을 뽐내야 하는 가을 단풍은 도시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카키 갈색의 E.L.S으로 한 톤 낮게 조율된다. 특히, 결혼식 파티 장면의 E.L.S은, 여러 색감들이 공간적 배경에 묻힐 수 있도록 드레스 색상을 인물 위치에 따라 계산해서 배치함으로써 파티의 화려하고 밝은 느낌마저 차가운 푸른 톤으로 만들어버리는 극강의 표현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의 색채는 대부분 회색빛의 무채색 톤이거나, 과거의 추억이나 오래됨을 떠올리게 하는 갈색의 세피아 톤, 또는 낮은 채도의 차가운 푸른색 톤으로 그려지며, 원색의 생생함은 최대한 절제된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노란색이나 밝은 파란색의 생생함은 매우 인상적으로 보이는데, 주로 토마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제랄드와 함께 있는 경우 거나, 조한나와 미미를 향한 자신의 열정이나 진심이 드러나는 경우들이다. 또, 토마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난 후, 아버지와 이야기하며 걷는 공원의 단풍은 전 보다 훨씬 생기 있는 원색의 색감들을 드러낸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뉴욕은, 각종 전시회와 박물관, 도서관과 서점, 브로드웨이 공연장과 센트럴 파크라는 매력적인 공간들이 있는 세계 최대의 문화 도시이다. 영화는 시작 부분부터, 뉴욕의 문화예술적 성격을 전면에 내 세우며, 그림을 그리듯이 뉴욕을 표현하고, 전시장과 공연바, 빽빽한 나무 숲 공원들과 삭막한 도심의 거리를, 포크송에서 재즈까지 풍성한 음악과 함께 묘사하며 공을 들인다.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 토마스는 작가를 꿈꾸고, 그의 멘토와 같은 제랄드는 소설가이며, 영화 마지막에 제랄드가 들려주는 이야기 또한 "3명의 예술가 이야기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볼 때, 결국 이 영화 <The Only Living Boy in New York>은 뉴욕이라는 문화예술적 공간에 살고 있는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표면적 이야기 구성은 토마스의 정체성 찾기 성장 드라마지만, 그 속에 감춰진 감독의 주제의식 속엔, 세상 어느 곳보다 핫했던, 뉴욕의 잃어버린 열정과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 토마스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진다. 아버지의 연인을 사랑한다는 설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랙스를 떠오르게 하면서, 금기에 도전하는 예술가적 성격을 드러내는 코드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공 토마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예술적 혼돈을 겪고 있으며, 그 혼돈에 질서를 부여해 줄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며, 금기에 도전하는 비판적 시각을 가진 미완의 예술가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는 그가 사랑하는 두 여인을 모두, 여신 같다거나, 최고의 미녀라는 말로 표현하며,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
그래서 토마스가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핵심 인물인 제랄드의 말들은, 토마스에게 하는 말일뿐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영혼을 잃어가고 있는 문화의 도시 뉴욕에게, 또는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감독이 전하고 싶은 말로 읽힐 수 있다. 유난히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을 사랑하고, 섬세한 예술정신과 풍성한 감각적 표현력을 가진 마크 웹 감독이 이 가을, 제랄드의 대사로 전하는 메시지를 여러분도 한번 생각하고 느껴보시길 바란다.
자네, 삶에서 원하는 게 뭔가?
잘 생각해봐!
넌, 짜릿한 걸 원하고 있어!
넌 재능이 있어!
열정을 잃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