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씽 - 사라진 여자>
어둠 속에, 지선의 목소리와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문을 열고 급하게 집으로 들어오는 지선. 한매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꼬물꼬물 엄마에게 기어 오는 돌배기 딸 다은이를 볼 사이도 없이, 다급한 홍보기사를 작성하느라 바쁘다. 일을 끝낸 후, 다은이를 위한 토끼 인형을 들고 아이 방으로 가보지만, 다은이는 이미 한매 품에서 잠든 후다.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처럼 소용돌이치는 녹즙과 믹서기 굉음으로 시작하는 다음날 아침. 다은이를 피붙이처럼 보살피는 조선족 아기 돌봄이 한매가 다은이와 함께, 출근하는 지선을 배웅한다. 그 후 지선의 공간에서 다은과 한매는 사라져 버린다.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의 프롤로그는 지선 위주의 씬 구성과, 지선의 딸 다은 중심의 앵글로, 주인공 한매의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생략시키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한매의 얼굴은, 다은이를 안고 지선을 배웅하는 프롤로그 마지막 장면에서야 제대로 드러나고, 지선이 그녀를 찾아다니는 영화 전반부 내내 한매는 철저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지선은 자신이 한매의 사진 한 장, 주소 한 줄 똑바로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한매에게 고맙다고 선물도 했지만, 그녀의 사연과 아픔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깨닫는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는 생존을 위해 바쁘게 살아내느라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의 사연에 엮여 들고 싶어 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재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적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결국, 영화 후반부에서도 밝혀지듯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겐 간접적 폭력이 되고, 고통을 주며, 결국 그 고통의 칼날은 자신을 향하게 된다.
간신히 실마리 하나로 추적해 들어가며 밝혀지는 한매의 사연은, 매매혼으로 팔려온 조선족 여인이 자신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프고 처절한 이야기다. 한매의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녀의 언어 교육을 가로막아, 우리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채 학대를 일삼고, 아들 손자가 아니란 이유로 손녀를 치료조차 하지 않으려는 시어머니 때문에 아기를 데리고 도망친 한매는 아픈 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몸까지 팔아 돈을 마련하지만 남편에게 착취당하고 만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병원에서 딸의 보호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채, 그 병원 의사였던 지선의 남편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기를 지키려고 했던 한매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 품에서 죽어가는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족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짓밟히는 동안,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하고 처참하게 아이를 잃게 된 한매는 분노의 복수를 계획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지선의 상황도 한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괴된 딸을 되찾기 위해 지선은 고군분투하지만, 형사들은 아이가 실종됐다는 지선의 말은 무시한 채, 남편과 남자 변호사의 말만 듣고, 그들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려 한다. 이혼하기 전이나 후나, 의사 남편은 바쁘다며 아이 문제마저 어머니에게 떠맡기기 일수고, 이혼 후 양육권 조정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인 아이와 엄마의 모성 보호에 앞장서야 할 법원은 지선의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남성 클라이언트는 육아에 대한 몰이해 속에 업무상 피해를 준다며 지선에게 비난을 퍼붓기까지 한다. 아이와 함께 엄마로서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가려는 지선은, 남성 중심 사회의 자기 중심주의 속에 비난받고, 공권력의 무관심에 소외당하면서,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기 위해선, 누구의 도움을 기대하긴 커녕, 혼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현실에 내몰린다.
그래서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는 한매와, 잃어버린 다은이 생각에,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아이 방에 쓰러진 지선을 교차 편집한 장면은, 두 여성의 동질감과 사회적 약자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두 모성, 소외되고 상처받은 여성의 공통적 아픔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영화 속 주제의식을 담아낸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된다. 이 장면을 통해 공감되는 두 여성의 정서적 연결고리는, 뒤에 다은이를 제발 돌려 달라며 울부짖는 지선에게 공감한 한매가, 무사히 다은이를 돌려주게 되는 클라이맥스의 정서적 개연성과 설득력을 뒷받침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교차편집이 드라마의 정서적 토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지선이 놀이터로 공간을 이동하면서, 두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정서적 유대감이 애매하게 단절돼버린다는 점이다. 물론, 놀이터에서 행복했던 한때도 회상할만한 장면이지만, 정서적 몰입감을 깨면서까지 굳이 지선이 놀이터로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방에서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한매와의 교차 편집으로 중첩시킨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넋 나간 표정으로 놀이터 장면을 회상했다면, 공간을 이동한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정서를 단단히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아쉬운 점은 영화 후반부 결론이다. 근래 보기 드물게, 여성에게 가해지는 은밀한 사회적 차별과 소외의 문제를 초반부터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 <미씽 - 사라진 여자>는 영화 앞부분과 달리, 후반부에서는 그 모든 문제의식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영화 시작부터 섬세한 결로 드러났던 육아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 체계 속 보이지 않는 남녀 차별, 가부장적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얕잡아 보는 남성 편향적 시선과 질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모성으로의 회귀’라는 상징적 결론으로 영화가 마무리돼 끝나버린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야기의 층위를 복합적으로 생성해 내며, 실종된 아이를 찾아 헤매는 엄마의 추적 스릴러라는 장르적 흐름과, 남성 중심 사회 제도 속에서 소외와 차별을 당하는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의 흐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결말도 그 두 가지 흐름의 가치판단에 걸맞은 복합적 함의가 담긴 결론을 보여주며 완성해 냈어야 했다. 하지만, 후반부 결론은 표면적인 추적극으로써의 장르적 결말만으로 끝내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디테일한 작은 설정 하나만으로도 보완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지선이 아이를 되찾아 품에 안는 장면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법적 문제들을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지선 뒤에서 속닥이며 서있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연상시키며 풍성한 결론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작은 디테일 하나를 놓치면서 영화의 결말은 뭔가 해결되지 않고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듯한, 찜찜한 느낌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아마도 결말에 아쉬움을 느낀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점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의식의 섬세한 칼날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깊이 있게 숙고하지 못 한 채, 제대로 힘 있게 휘두르지 못한 이 영화는, 중반까지 꽤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잘 끌고 왔기에, 결말의 완성도 측면에서 더욱 큰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미씽 – 사라진 여자>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이야기를 하며, 사회적 관계에서 은밀하게 소외당하는 여성 차별의 문제를, 상업 영화가 가진 구조와 형식에 맞게 잘 담아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스릴러 추적극이라는 나름의 상업적 완성도를 갖추고, 우리 사회 속 여성의 존재감의 문제라는 얕지 않은 주제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여성 감독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의 완성도에선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OECD 최고의 저 출산 국가인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권력의 은밀한 차별을 상업영화 테두리 안에서 제법 힘 있게 고발했다는 점에서 <미씽– 사라진 여자>는 2016년 한국영화의 의미 있는 문제작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