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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아 Mar 28. 2024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보내는 찬사

겪어야만 보이는 것들

일요일 저녁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집으로 서둘러 들어가다가 저 멀리 바로 옆 단지에서 나오는 한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여서 어두운 실루엣만 보였는데 남자의 어깨 위로 두 아이가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단번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존재란 얼마나 위대한가 싶어서.


지금 세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어버이날엔 '어머님 은혜'란 노래가 대표곡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버이날은 매년 돌아오기에, 두고두고 많이 부를 거라 생각했지만 사춘기를 겪고 어느새 부를 일은 거의 없고 들을 일은 더더욱 없어지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나에겐 돌아가신 할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는 아빠가 계셔서 때때로 듣거나, 아님 얘깃거리로 떠올려지곤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밤, 아이의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중 문득 그 노래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확히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라는 구절이었는데 떠올려지기가 무섭게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많이 부르고 들었던 노래였는데 이 구절이 갖는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하고.



조금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고 낳아서일까. 

나는 꽤 자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그 말이 그런 뜻이구나, 그 사람의 그때 그 표정이, 그리고 다 말할 수 없어서… 으로 묵음 처리 됐던 그 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리고 동시에 부모란 존재에 대한 존경심을 새삼스럽게 갖게 된다. 보통 부모라는 단어에 항상 따라붙는 가장 흔한 단어를 떠올리자면 희생이란 단어일 듯하다. 사실 감사하다라고 생각하고 늘 빚진 마음으로 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감사하다고 했던 것인지 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을 나의 아이를 만난 이후에는 자주 마주하게 된다. 


또한 동시대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탄 역시 이어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 내가 조금 늦게 아이를 가진 편이어서 가깝고 친한 친구들이 이미 아이가 하나 혹은 둘 있는 상태였었고 자주 혹은 종종 만나면서 친구들의 삶이 얼마나 바뀌어 가는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당시 싱글인 나의 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가는 그 길이 험난해 보여서 힘들겠다 힘들겠다 싶었지만 실제 그 삶을 뒤늦게 겪어가면서 지금의 나는 그들을 그저 존경의 눈길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달까.


하지만 동시에 희생이란 단어를 그렇게 획일적, 평면적, 일차원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를 낳은 이후에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인 "힘들지?" 란 말에 대개의 나의 반응은 "네, 힘들어요. 쉽지 않네요."라는 대답이지만 이 짧은 대답이 모든 상항을 설명해 줄 수 없달까.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편적으론 이런 예를 들 수 있다.


조카 혹은 친구아이를 안아서 들어 올릴 때에는 보통 '윽'소리가 잘 나곤 했다.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자라는 아이들이기도 했고, 평소에 그런 무게를 들어 올릴 일이 없다가 나에게 체중을 다 실은 무언가를 들어 올린 다는 것이 말 그대로 윽 소리가 날만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3kg가 채 안된 작은 아이를 안는 것부터 시작해서 12kg에 가까운 요즘의 아이로 자라나는 동안 나의 근육들도 함께 단련이 되는 느낌이다.


비단 이런 몸의 근육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도 조금씩 단련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육아란 정말 불투명하고 가본 적 없는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 와중에 나처럼 위기대응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빛 하나 없는 터널을 맨발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는데, 요즘처럼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가까운 지인들부터 멀게는 맘카페까지. 물어보고 찾아볼 곳이 존재하기에, 반딧불이를 잡아서 등 안에 넣어놓고 조금씩 걸어 나가는 형국이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존경을 담게 된다. 쉽지 않지만 내려놓지 않고 꿋꿋이 걸어간 그 모든 길들에 대한 찬사를. 처음이기에, 잘 모르기에 시행착오가 가득했을지라도 희생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살아낸 길들을.



하지만 어제저녁에도 친정아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직은 더 살아봐야 알거여"

아직도 알아갈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인 거겠지. 조금은 두렵지만 또 조금은 설렌다, 그 알아감의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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