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관 직경이 5cm밖에 되지 않아요.”
바로 어제 밤, 설거지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뜨거운 물을 싱크대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아 다가가 보니 조금도 내려가지 않고 그야말로 꽉 막힌 상태. 그 상태에서 화장실에서 쓰는 뚫어뻥을 가지고 펌프질을 하니 시커먼 조각들이 쏟아지긴 하는데 물은 여전히 내려가진 않았다. 몇 번을 더 해도 가망이 없다 생각되어 지켜보던 내가 사람 부를까 물어보니 응 하길래 바로 숨고를 통해 업체와 컨택했다.
1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할 거라길래 기다리고 있는데, 싱크대에 넘실거리는 물과 까만 조각들, 그리고 정작 내려가는 입구는 검은색 물이 넘실거려서 원래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고 시간이 조금씩 지나니 악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50분 정도 경과한 다음에 오신 기사님은 이미 배관이 막혀 있는 상태라 클리닝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가격을 고지하고 작업을 시작하시기 시작했다. 작업의 시작은 싱크대에 가득 넘실거리는 물을 어마어마한 소음이 나는 진공청소기 비슷한 것으로 흡입하는 것 먼저, 그다음에는 밑바닥 관에 고여 있는 음식물 찌꺼기들을 두드려 빼서 내려가지 못하고 차 있는 물들을 빨아들이는 것이 그다음이었는데, 그 작업들을 하는 동안 악취가 심하여 영하의 날씨에 집 창문과 베란다 문까지 싹 다 열어놓고 환기를 시켜도 냄새가 잘 빠지지 않는 정도였다.
앞서 쓴 직경 이야기는 기사님이 작업을 다 마친 다음에 나에게 건넨 거의 마지막 말이었다. 생각보다 직경이 작으니 조심해서 쓰시라는 뜻이었는데, 오 생각보다 정말 좁구나 싶어서일까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서까지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뇌 안에서 기억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결국 단기/장기에 걸쳐 각각의 기억들이 세분화되어 저장되었다가 결국 각자도생하게 된다. 지워질 기억들은 지워지고, 남을 기억들은 남겨지고. 그 기억들 중 남기고 싶지 않지만 남겨지는 기억이 있고, 꼭 기억하고 싶어도 사라지는 기억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앙금, 응어리, 한의 자리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이 다 그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고 흘러가는 일들이 있고 그 중 남아 있어 자리하고 있는 일이 있을 테니.
기사님이 도착하기 전 악취가 나고 넘실거리는 까만 싱크대를 바라보며 내 마음의 한구석이 꼭 저와 같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복수하고 싶은 마음, 두고 봐라 싶은 마음이 한데 뭉쳐져 있는 곳이 꼭 저와 같을까. 그 마음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을 때, 도저히 흘려보내지 못하고 힘들어할 때의 내가 생각났다. 다행히 현실이라는 짐이 늘 존재하니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흘러가겠지 싶어 덮어두었다가 한 번씩 열어보면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있긴 하여 여전히 덮어두고 있다만.
뚫는 것을 보았으니 나도 그런 식으로 한 번 뚫기를 도전해 볼까. 이미 넘실거리는 마음과 감정들을 싹 다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그다음 꽉 막힌 구간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빼내고, 흘러가지 못하고 차 있던 마음들을 마지막으로 흡입하고 나면 비로소 그 막힘은 해소가 될까.
어떻게 되었거나 일어날 일이었을까, 피할 순 없었을까, 좀 더 빨리 알아차리고 비껴갈 수는 없었을까라는 생각 다음으로 실제 일어났던 그 일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일이 나에게 영영히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을 얘기해 주면서 조각들을 분해하고 나면 남아 있는 배신감, 우울감, 무력감 등을 흘려보낼 수 있으려나.
어떤 해결 방안을 엿본 것 같아서 기사님이 방문하기 전에 넘실거리는 싱크대를 찍어두었다. (다소 혐오감이 들 수 있어 글에는 첨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마음의 배관에 막힘이 해소되면 그때는 사진에서 지우고 함께 흘려보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