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재밌지 않아? 아버님의 그 질린 표정을 봤었어야 했는데.”
나의 깔깔거림에 남편은 동조해 주지 않았고, 표정을 굳힌 채로 “재미없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이 의아했다. 난 이게 너무 재밌었는데, 왜지?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나의 말을 듣고 웃는 친구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말로 상대방을 웃길 수 있는 게 좋아. 굉장히 성취감이 느껴지더라고.” 별달리 머리를 굴려서 한 말이 아니고 툭 던진 말에 반응이 좋을 때는 그 성취감이 더 고조되곤 했다. 하지만 개그 쪽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얻어서 나오는 반응이 좋았을 뿐이다. 당시 웃음이 박한 가정에서 살아서인지 그 반응이 웃음일 때 가장 희열이 컸을 뿐이지만.
사회생활 초반부에 만났던 극한의 컴플레인 상황에서, 나는 나의 사수 격인 선배에게 불려 가 혼난 적이 있었다. 왜 고객에게 맞서려 하냐가 골자였는데, 거기서 나는 끝까지 ‘잘못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실제로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그저 앞에서 멀대같이 서 있다가, 더 이상의 피드백을 못 받을 것 같았는지 선배가 “가 봐라”라는 말을 하자마자 꾸벅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그 순간 속상함이나 분노 대신 형형한 당당함이 가슴속을 꽉 채우는 나를 보며, 스스로를 조금 기이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결혼 후, 남편과의 다툼이 길어지는 순간에 너무 대립이 심하다 느껴지는 시점에서, 한 번씩 내면에서 웃음이 터질 때가 있었다. 상황이 재밌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는 순간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나의 논리에 상대방이 마땅한 반박을 내세우지 못하거나, 내가 너무 논리적으로 받아쳐 순간적으로 남편이 말문이 막히는 때에 그랬던 것 같다. 이 사람 고생이 많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며칠 전 아버님과의 대화에서는 ‘만약 갑작스러운 죽음이 온다면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어머님과 아버님 두 분이 이야기를 가끔 나누실 때, 어머님은 아직 이런 가정을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후 “아버님 혹시 제가 그렇게 되면…”이라는 말을 두 차례쯤 했을 때, 앞서 남편에게 말했던 아버님의 표정이 그러했다. 기가 찬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알아들었으니 그만해라가 복합된 표정이랄까. 온화하신 아버님에게 그런 표정을 끌어낼 수 있는 문장이 있었구나 싶어서 재밌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낄낄거리는데 남편은 왜 표정이 굳었을까.
나는 남편과 대부분의 성향이 정반대이다. MBTI도 정반대고, 나이 차가 좀 나서 교묘하게 시대가 비껴가기도 했다. 나이로만 따지면 같은 학교를 다녔던 시점은 초등학교뿐이기에. 성별의 차이, 자라온 집안 환경의 차이만으로도 충분히 다를 수 있는데, 거기에 차이를 벌리는 요소들이 겹겹이 쌓인 느낌이다. 반대가 끌린다는 말을 정말 실천적으로 살아낸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연애 때까지는 달라서 매력일 수 있었던 것들이, 결혼 이후에는 그대로 시시각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바뀌긴 했지만.
한편 남편을 만남으로 인해 나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정반대, 정확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한 가정을 더 잘, 혹은 자주 한다는 것이었다. 임기응변이나 융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기에, 최대한 미리 짐작해 두고 아주 대충의 아웃라인이라도 그려 놔야 혹시 그 상황이 왔을 때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싶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사실 나는 세상의 온갖 불안과 걱정을 끌어안고 혼자 머릿속으로는 백 번도 넘게 시뮬레이션을 하는 편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 특히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것이었는데, 작년에 한 번 그리고 최근에 또 한 번 겪은 증상이 이 부분을 더 강화시키는 버튼을 눌러 버린 듯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마음의 준비를 혼자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말로 꺼내 나눌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죽음이 끝인가. 이 질문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것. 적어도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대비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나의 죽음 이후,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시간들에 벌어질 사건들에 대한 간섭과 잔소리를.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죽음에 쿨하지 못하다. 죽음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마치 부정적인 무언가를 불러올 행위처럼 여기는 경향도 있고, 그만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감수성을 지닌 민족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Good goodbye’라는 개념을 꼭 실현시키고 싶은 나의 뜻을 과연 관철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가장 쿨할 법했던 시아버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휴,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최근 겪었던 증상으로 내일 진료를 받으러 간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오게 될지, 어떤 처방을 받게 될지, 그 진료 자리에서 나는 과연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 궁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