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엄마는 쪼끔만 좋아."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서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의사 표현을 할 때부터 호불호에 대해 늘 공평한 아이였기에 이 말이 뜻하는 바 역시 잘 알았다. 나의 기준으로 해석했을 땐, 엄마는 이제 싫은 사람에 가깝다는 뜻이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랑 며칠간도 헤어져 있지 못하겠다며 울고불고하던 아이는 어디 갔을까.
어쩐지 저 말이 남았다. 늘 그렇듯 부정은 긍정보다 더 힘이 센 느낌인지라, 부정당하는 느낌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탓이리라.
커피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기록한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부터 당장 내 옆엔 커피 대신 뜨거운 물을 담은 텀블러가 있다. 열어 놓은 넓은 텀블러 입구에는 김이 서려 자글자글 맺힌 수많은 물방울이 보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못 마시니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야지 싶어서 출근하자마자 물부터 길어 왔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이건 근거 기반의 팩트이자 측정 가능하면서도 측정 불가능한 지표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라는 똑같은 것에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속도, 정도, 반향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겐 확실히 이 스트레스라는 것이 최근 몇 년 사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리고 그 누적의 결과가 지금 저 텀블러겠지만.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는 연예인이 아닐지라도, 사람이란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에 당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악플의 힘이 센 것이고, 신체 중 작은 부분인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숙어로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참 공평하지 않게, 비난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가볍고 당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다. 응당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무게까지 당하는 사람이 부러 가져오는 격이랄까. 하지만 똑같이 비난을 당해도 그에 대한 반응이 참 다를 수 있구나를 몇 개월에 걸쳐 본의 아니게 관찰하는 중이다.
왜 그걸 누군가는 무겁게, 누군가는 가볍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무겁게 반응하는 나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돌이 날아왔을 때 그 돌이 내 몸을 맞고 땅바닥에 구르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던진 사람을 본다. 그리고 맞은 곳을 본다. 그리고 다시 안 맞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살펴보고, 현재로선 달리 상황을 바꿀 수 없음에 절망하며 다음에 맞게 될 돌까지 먼저 아파한다.
한편 가볍게 반응하는 이들의 입장을 지켜보면, 돌이 날아왔을 때 먼저 그 돌을 본다. 그리고 몸을 살짝 옆으로 피해 돌이 스치게만 하고, 떨어지는 돌을 보는 대신 던진 사람을 향해 "네가 뭔데"라고 말을 한다. 다시 돌이 날아올 것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같은 입장이 반복될 땐 오히려 더 유연하게 몸을 비낀다.
이렇게 명료한 차이는 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상황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작음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를 부정당할 때 그저 어깨만 가볍게 으쓱할 수 있는 것. 스치면서 작은 상처가 날 수 있지만 그것을 그저 흘낏하고 넘길 수 있는 것, 나는 왜 이것을 못할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가 왔다. 더 이상 스트레스를 내 인생의 근원이 되게 둘 수 없는 몸의 상태가 되어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학습이라도 해서 앞으로는 그리 살아가지 않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엄마, 언니 오빠가 나랑은 놀기 싫다고 저리 가래." 어제 오후 어린이집 앞 키즈카페에서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 놀고 싶었지만 끼워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던 아이에게 내가 한 첫 말은 "그럼 다른 거 하면서 재밌게 놀까?"였다. 존재가 부정당할 때 내가 내렸던 첫 번째 해결책은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공간에 있으니 아이는 다른 활동을 하면서도 계속 언니 오빠들이 하는 양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한 번 더 기웃거렸다가 다시 저리 가라는 소리를 듣고 와서는 조금 속상해하다가 트램펄린을 타러 달려갔다. 그리고 다 놀고 집에 가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언니 오빠가 와서 같이 놀자 했지만, 이미 갈 마음을 먹고 있던 아이는 다시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흘러가는 것이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 순간에는 그것만 보이고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 자못 당연하지만, 흐린 눈을 장착해 본다.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이 아니라면 더더욱 흐린 눈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캐치볼을 할 때 공을 끝까지 응시하듯 돌 그 자체를 최대한 응시해 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조금이라도 틀어 정면으로 맞지 않도록 노력해 본다. 그런 나의 노력이 상처를 덜 내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연습해 볼 일이다.
졸린 눈에 힘이 들어가진 않지만, 벌써 식고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다시 길어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