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과 언젠가 이야기하다가 같은 부분에서 공감이 되며 빵 터진 부분이 있었어. 내가 어디 가서도 이런 대우를 안 받는데 왜 자식들에게만..”
어제 밤늦게까지 시어머니와 수다를 떨다가 나왔던 이야기였다. 딸이 없는 어머님은 잘 모르는, 딸 가진 엄마들의 애환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는데, 아이가 자라는 동안은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고 다 자란 이후에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는 딸로 변모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대학생이 되어서 슬슬 그러기 시작했던 듯하다. 엄마가 엄마지만 한 인격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낀 건 그보다도 훨씬 수년 전이지만, 나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으로만 따진다면. 그리고 시작은 슬슬 이었지만 30대가 가까워질 무렵엔 그것이 엄마의 귀를 따갑게 만들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잔소리의 근간을 살펴보자면, 다 당신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마치 내가 어렸을 적 듣고 자랐던 것처럼. 한편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우리 엄마는 그리 잔소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다 내가 어련히 잘해서였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오긴 했다.
하지만 나도 똑같이 딸을 낳고 키우면서 보니 말을 덧댈 수 있는 곳은 너무나도 많았다. 말, 행동, 사고 등 본인은 다 컸다고 생각하며 하는 모든 것들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니 허점투성이였다. 논리가 비약적이거나 맞지 않거나 아예 틀렸음에도 우기는 등. 보일 때마다 말을 더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순환이 이어졌다.
그러고서 다시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의문이 가득해진다. 엄마는 나에게 왜 말을 더하지 않으신 걸까. 사춘기 때야 말을 더하면 싸움으로 이어지니 그럴 수 있다 싶지만, 사춘기 때야말로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엇나가 보이는 것이 많았을 텐데. 가끔 등짝을 몇 번 맞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엄마가 할 것이 없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더하는 모든 말들이 당신 딸을 위한 것들이었을 텐데도 굳이 말을 아끼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한편 나도 아이를 낳은 시점부터는 엄마에게 말을 아끼고 있다. 아이의 백일 무렵부터 두 돌이 될 때까지 먼 길을 오가시며 아이를 돌봐주신 데 대한 감사함과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느낀 엄마의 노고에 대한 존경을 담아 내 입을 닫게 된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 한 번씩 입이 간질거리긴 하지만 대부분은 꾹 삼키고 엄마의 안녕을 진심으로 응원할 뿐이다.
한편 나의 기질 중 통제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한국 나이로 갓 다섯 살이 된 아이가 요즘 내 눈치를 많이 살피는 것 같다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공통된 증언을 돌아보며, 내 안에 있는 통제성이 아이를 옭아매기 시작해서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아이가 힘들어하기 시작한 것일까 싶은 것이다.
유퀴즈에 출연하셨던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의 말씀처럼 아이는 내 삶에 찾아온 ‘손님’인데, 그 손님에게 눈치를 보게 만들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다. 이제부터 시작일진대 시작이 반이라고, 이런 말들을 주변에서 들을 때 그저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나의 표정과 말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에 대한 통제성이 강한 부모였던 아빠를 힘들어했던 것만큼 아이가 나를 힘들어할 수 있을 것이기에.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연약한 나 자신이, 나의 보호 아래에 있다고 아이를 통제하지 말 일이다.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며 자라나는 아이에게 언제까지나 기댈 만한 조력자의 역할로만 못을 박고, 그 아래에서 훨훨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도록.
이러다가 입을 스스로 꿰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나이를 먹는 방식 중 하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