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아빠가 볼일이 있으시다 하여 가족이 다 함께 부산에 갔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차로 5시간은 걸리던 거리였고, 그렇게 멀리까지 다 함께 가는 게 퍽 오랜만이었다. 들뜬 마음도 잠시, 부산에 도착해서 아빠는 볼일 보러 가시고 나와 엄마, 남동생은 덩그러니 영화관에 떨궈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상황은 잠시 뒤에 일어났다.
영화관 매표소 앞, 제목/시간/상영관이 연이어 나오는 반짝이는 전광판 앞에서 나와 중학교 3학년 남동생, 40대 중반인 엄마의 선택이 갈렸다. 2:1도 아니고 무려 1:1:1.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각자 입장 가능할 것으로 보여 1:1:1을 채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했으나 혼자 나가서 엄마와 남동생을 기다리는 무료함을 잊을 방법이 없었기에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했기에.
그날 내가 선택한 영화는 공포영화였다. 원래 나는 토요미스테리와 전설의 고향을 아주 즐겨 보던 공포물 마니아였기에 그날도 영화관에서 공포영화 한 편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눈을 반짝였고, 영화관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설레며 들어갔었다. 근데 오감이 다 충족되는 공간에서 공포라는 단어를 오롯이 느끼며 어디로도 피할 곳 없이 장면을 흡수해야 하는 공간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생에 나에게 공포영화는 없구나, 하고.
그 뒤로 나는 공포와 스릴러, 거기다가 한 가지 장르를 더하자면 폭력/살인이 주가 되는 것까지 전부 보지 못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 후 남편의 제안과 평단의 평가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어스라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고, 나올 무렵에 나는 거의 혼이 나갈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리고는 단번에 14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고 비교를 하게 되었다.
단순히 오감을 다 충족하게 되는 공간이어서 영화관에서 보는 공포물이 더 무섭다는 1차원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어스를 보고 나서, 심지어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장면의 몇 컷이 기억난다. 그 영화가 생각할 거리를 유독 많이 던지던 영화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떤 장면이 머리에 남았을 때 잔상이 오래가는 사람인 탓이리라. 또한 스크린이 살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가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는데도 나는 마치 내가 직접 그 상황에 닿은 것처럼 느끼는 정도가 유독 큰 듯했다. 그러하니 다른 이들에겐 마니아가 될 정도로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나에겐 가당치도 않은, 오히려 즐기려고 하다가 독이 되는 장르가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요즘처럼 OTT가 전성하는 시대가 되어서 생긴 새로운 습관이 있다. 바로, 정말 재밌는 드라마나 예능을 좀처럼 끝까지 단숨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깨달음을 주고 감동을 주는 어떤 포인트를 느껴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시점을 기점으로 나는 다음 편을 보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또 미룬다. 지난 주말,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한 이유에 대해 내가 명확히 제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천년만년 방영하는 시리즈는 없고, 아무리 극찬받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요즘 OTT에 풀리는 것들은 끝이 명확하고 다음 시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시점에는 그 시즌이 끝인 셈이다. 그러하다 보니 유한함을 인정하고 끝이 나는 것이 볼 때의 그 허전함과 아쉬움을 미리부터 땡겨와서 덮어두는 것이다.
한편으론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그 감동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기 위함도 있다. 이후에 진행되는 서사와 완결성을 끝에서 다시 돌아봤을 때는 그 감동이 희석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 이 작품 진짜 좋다,라고 느껴지는 지점에서 일단 스페이스 바를 내 마음속에 눌러놓고, 충분히 그 감정이 소화된 이후에야 다음으로 넘어갈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은 배부른 이야기일 수 있다. TV 본방송을 놓치면 재방송이 요원하거나, 인터넷에서 다시 보기로 볼 수는 있지만 유료 거나 서비스 중단에 대한 우려가 있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한편, 넷플릭스에서 한 번씩 방영이 중단될 예정인 리스트를 알게 되면 나는 누구보다 그 리스트를 샅샅이 살펴본다. 혹시라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영화나 드라마가 있을까 해서. 언젠가는 봐야지 하고 미뤄뒀다가 서비스 종료로 나중에 힘들게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해서. 그리고 그때는 이미 봤던 작품까지 포함이다. 다시 보고 싶을 때 못 볼 수도 있으니까, 하고.
어떤 장르를 아예 배척하는 나와, 작품이 너무 좋아서 보기를 중단하는 나는 둘 다 '못 본다'라는 측면에서는 같고 그 이유를 파보니 결국 결이 비슷함을 깨닫는다. 너무 잘 느껴져서라는 면에서.
그래서인지 인생을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다. 삶에서 느끼는 염려와 불안이 쉽게 증폭된다. 그러면서도 결말을 모른 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금 누리는 감사함이 사라질까 걱정한다. 헛웃음이 나지만, 무던해지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냄의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