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것은 감정이었다

오세이사를 보고

by Ben Frost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녹아 있습니다. 아직 영화 시청 전이거나 스포일러를 극혐 하시는 분은 영화를 보고 다시 읽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연말, 나에겐 작은 꿈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백만 년 만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꿈. 하지만 그 꿈은 채 실현되기 전에 좌초되었고, 그렇게 연말도 꿈도 흘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전 설 명절을 앞둔 주말에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다녀왔고, 그렇게 나는 네 시간 정도의 짧은 자유를 집에서 맛보았다. 나의 휴식 루틴의 베이스가 되는 양념치킨을 시킨 후 넷플릭스를 틀어 무엇을 볼까 하고 채 고민도 하기 전에 메인 화면에서 결정이 끝났다. 지난 연말 예매까지 해놓고 보지 못했던 영화가 거기 있었다.


치킨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한정된 시간이었던 터라 나는 일단 영화를 틀었다. 한파가 휘몰아치는 한겨울이었지만, 따뜻한 빛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맞이하는 영화의 처음은 매미 소리가 가득한 한여름이었다.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면 몰입이 방해되었겠지만, 마음의 여유까지 더해진 그 시간에 나와 영화 사이를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서는 기억에 대한 영화인가, 기억을 못 하는 사람과의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고 궁금했었는데, 그 서사를 풀어가는 속도와 방식이 꾸밈이 없고 어찌 보면 관객과 함께 발맞추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서사가 조금씩 완성되어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 장면은 급하게 전환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관객은 여자 주인공과 함께 간다.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있다. 머릿속 기억은 없지만 손은 자꾸 그리게 된다. 그 아찔한 간극에 관객도 어리둥절해진다. 지금까지의 장면은 뭐였지 하고 궁금함이 쌓여갈 무렵, 남자 주인공의 독백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혹시, 만에라도…” 그리고 그 장면쯤에서 내 마음도 눈물도 함께 허물어졌다.


기억이란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겪은 사건은 살아 있는 생물 같은 느낌인데, 그것이 각 개인에게 기억으로 자리 잡을 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리 잡는 것이 흥미롭다.


한편 사라지는 기억은 어떤가. 어떤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이어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게 되지만, 어쩐지 이름도 얼굴도 다 기억날 것 같은 감정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한 달 전 즈음 고등학교 친구들과 밤새 깔깔거리며 이야기할 때도 계속 반복되었던 장면이었다. 친구 한 명이 벌써 20년도 훌쩍 지난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놀라운 순간에, 웬만해선 기억에 많이 남겨져 있다 여겼던 나의 자부심이 무참히 깨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어떤 사람, 어떤 사건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음에 놀라 그 깨짐이 전혀 아프지 않던 밤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오래까지 뇌가, 마음이 붙드는 기억이란 감정이 섞인 기억이지 않은가 싶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분명 뇌에서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체화된 기억으로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자꾸 그리게 되었던 신비로운 일처럼.


오늘, 아이의 어린이집 졸업식이었다. 내년에도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지만 이번 학년의 종강식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전부에게 쓴 편지를 보던 중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야.’라는 문구가 있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도,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 유대 관계를 쌓는 것은 아이지만, 1년 가까운 시간을 주 5일씩 짧게나마 계속 보는 루틴을 가져가면 학부모인 나 역시도 선생님과 정이 든다. 그리하여 헤어짐이 아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문구에 그렇지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헤어짐은, 헤어짐인걸.


그럼에도 기억은 힘이 있고, 특히 사람에 대한 기억은 어떤 물건, 상황, 사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힘이 있기 마련이다. 떠올렸을 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내 사춘기 전부를 보냈었다. 그때는 인상적인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었던 열망이 컸다. 하지만 강산이 두 번 변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적어도 떠올렸을 때 조금의 따스함이라도 묻어 있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좋은 사람 이어서라기보다, 그 마음의 여유에서 그리고 내비치는 호흡에서 따뜻함이 묻어 있는. 물론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음은 좋은 것이기에 꿈꿔 본다. 내가 겪을 다음의 어떤 이별에서든,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기억할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끝을 미루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