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포비아(Call Phobia)라는 단어를 처음 발견했던 인터넷 뉴스 기사 화면이 떠오른다. MZ들의 특징 중 하나로 서술하면서 이전 세대와의 확실한 비교를 보이는 부분이라는 언급이었는데, 단어를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아 이거였구나 하는 독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전화 좀 드리렴."이라고 조언하시는 시어머니의 당부에 쉽사리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던 모습, 실제로 전화를 드릴까 말까 키패드 위에서 몇 번 망설이다가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끄던 모습, 실제로 전화가 이어졌을 때 듣게 될 음성 앞에 무력감을 당겨서 느끼는 모습까지 스쳐 지나갔다.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세대적 특성 중의 하나라니, 뭔가 뒷배가 생긴 것 같은 든든함이 들어 풋 하고 웃어버렸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내가 이래서 그랬나 봐라고 얘기하는데, 남편은 공감 못 하겠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MZ의 가장 윗세대지만 나보다 어려서 확실한 MZ인 남편은 왜 함께 맞장구치지 않았을까.
어제는 아이의 어린이집 졸업식이었다. 전체 졸업은 아니고 1년의 마무리를 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담임 선생님과도 공식적인 마지막 작별의 시간이었기에 간단하게나마 가족들 모두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선물을 하원할 때 드렸다. 그리고 키즈노트에 올라온 마지막 알림장에 댓글로 고생하셨다고 남기면서, 나머지 가족들 특히 남편에게 댓글을 쓰라고 종용하였다.
이후 퇴근하고 밤이 되어서야 들어온 남편에게 댓글 간단하게 남기면 안 되냐고 얘기하니 등원길에 간단하게 인사 전하겠다며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남기는 게 뭐가 어렵다고 댓글을 만류하냐 하니 그 정도로 짧게 남기면 성의 없어 보이고 길게 남기자니 어렵고 말로 하는 게 좋다며 계속 거절하였다.
글이 편한 사람이 있고, 말이 편한 사람이 존재한다. 나는 글이 편한 사람 쪽이다. 마음을, 생각을 전하기에는 짧은 한두 단어나 문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오해나 불편감을 선사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문자적 전달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남편처럼, 말을 더 편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장점들이 고스란히 단점으로 반영될 수 있는 부분에 있었다. 기록을 남기기 싫고, 비언어적 의사 표현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부분까지 하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카카오톡의 업데이트 버전에서 새로운 기능으로 '수정' 버튼이 생겼다. 기존에 보냈던 대화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인데, 수정을 하게 되면 '수정됨'이라는 문구가 조금 더 작은 글씨로 옆에 각인된다. 문자이지만 말 같은 느낌의 톡(talk) 구조이기에 제한이 되었던 부분에 여지를 남겨 둔 것이다. 그로 인해 글이지만 말 같고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이를 좀 보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음성 통화는 여지가 없다. 비언어적 의사 표현이 불가하고 오로지 목소리 대 목소리로만 가능한 구조이자, 문자/메신저에서는 구현 가능한 버퍼링이 불가하다.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면 다음에 이어올 말을 예측이라도 할 텐데 보이지 않기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난처함을 가릴 수 있는 것이라곤 상대방도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게 가장 큰 한계이지 싶다.
다만 내가 궁금한 건, 이것이 세대적 특성이 될 수도 있으나 세대 안에서도 나와 남편처럼 개인적 취향과 성향에 따라 갈릴 수 있는 것인 만큼, 나이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융통성 있게 대응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망설이던 청년의 시기를 지나 나의 목소리에 힘이 생기는 중년, 목소리를 내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노년이 될수록 사라질 현상일 것인가가 궁금하다.
그런가 하면 전 국민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전 세계에서 스토리텔링/서사에 강한 문과생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지금은 어떤가. 비단 말로 하는 것만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 글로 쓰는 것도 힘들어하는 시대에 급부상하는 AI들은 인류를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과연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도 참 궁금한 부분이다.
설 명절을 보내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께 안부 문자를 드렸다. 전화를 할까 열 번 정도 고민하다가 포기하고는 몇 자 적어 전송한 이후로 답장이 올 때까지 2시간 정도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자주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나의 문자에 제자가 잘 살아주면 그것이 곧 기쁨이라 답장 주셨고, 그에 대한 답장은 더 하지 않은 채 문자가 끊겼다.
잘 살아가겠습니다,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건 나의 노력, 다짐만으로 되지 않는 일인 데다 공허한 약속처럼 들리는 문자를 돌려드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다시 선택한 나의 침묵이 부디 불편하진 않으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