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는 알았을까, 자신의 그림이 100년이 지난 후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며 전시회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자리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지난 주말 아이에게 그림 보러 갈래, 키즈카페 갈래 하고 선택권을 주었다. 최근에 나와 함께 다녀왔던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공포를 느끼고는 초입에서부터 나가자고 떼를 써서 결국 아이를 혼자 데리고 들어갔던 나는 그림을 거의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온 적이 있었다. 아직 그 기억이 있을 텐데 아이는 의외로 그림을 보러 가겠다고 대답했다.
4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나쳐 가게 되는 서울랜드를 두어 번 가는 동안에도 존재를 잘 몰랐던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깊숙한 곳에 웅장한 형태로 있어 놀랐다. 주차를 하고 미세먼지가 점점 더 뒤덮어가는 외부를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살짝 보이는 수많은 TV, 어머 저 작품이! 반가움이 앞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얼마 전에 작가의 삶을 다루는 시사예능을 봤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고,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크기에 절로 놀랐다.
그리고 전시관을 하나씩 살펴보며 가다가 초청전으로 와 있는 모네의 수련 작품 한 점을 만났다. 마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처럼 작품을 앉아서 감상할 수 있게끔 해 놓은 구조는, 그 관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 중 유일하게 받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이미 아이의 인내심이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태여서 마음이 급하기도 했지만, 전시관 조명이 다소 약한 느낌이라 그림을 보려면 의자가 배치된 곳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다 그림 옆에 있는 작은 캡션 속 설명을 읽는데 올해가 모네의 사후 1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서 나온 중얼거림이 앞선 저 말이었다.
미술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현대미술’을 다루는 곳이어서일까. 다른 전시관에서 그림 관람 중 몇 번이나 오! 하고 탄성을 질렀던 순간이 있었는데 아직 그 작품의 작가가 살아 있는 경우가 꽤 많았다. 보통 사람 이름 옆에 표시되는 출생/사망 연도 중에서 사망 연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채 물결(~)로만 남겨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작가가 사망하게 되면 이 캡션 속 사망 연도를 수정하기 위해 캡션을 뗐다가 다시 붙이게 되려나. 그땐 단순히 연도만 추가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평가도 더 수정하려나,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가 하면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처럼 교과서에서 이미 만나본 작품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작가들이었고 그 다양함에 새삼 놀랐다. 작가란 단어의 작(作)은 짓는다는 뜻이다. 짓는다는 작업은 그 대상이 정말 다양할 수 있기에 ‘작가’라는 단어 자체가 한 종류의 직업에 국한될 수 없음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나는 사람의 기본 본성 중 하나가 이렇게 창작하는 것도 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것과 작품을 내보이는 것, 인정받고 어딘가에 전시되거나 걸려 있게 되는 것, 누군가에게 소장 가치가 있어 소장되는 것, 그리고 사후 수많은 시간이 지나서까지 회자되고 생애가 반복해 조명되는 것. 같은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 깊이와 결은 수없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자꾸만 돌아보게 되고 작가의 이름을 캡션에서 한 번씩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날 모든 작품 중 내가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고 싶었던 작품은 처음 본 이름의 작가였다. 사진 촬영이 제한된 전시관이라 사진은 못 찍고 작가 이름과 작품명만 메모장에 적어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메모장에 적힌 작품 제목을 물끄러미 보면서 결국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구나 싶었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하지만 남겨진 작품은 불의의 사고로 없어지지 않는 이상, 또는 찾는 관객이 꾸준히 있는 이상 그 가치가 보존되며, 그 보존의 정점이 미술관이지 않을까.
작품은 말을 하지 않기에 고요함이 늘 상주하는 곳이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나의 머릿속과 마음은 시끄러웠다. 그리고 그 갭이 주는 아이러니가 흥미로웠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작품을 가만가만 보며 지나가지만, 저들의 내면도 저렇게 요란할까 싶어서.
작품의 무한함과 작가의 생의 유한함이 교차하는 미술관의 그 서늘한 대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