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조언

by Ben Frost

“소믈리에 같은 직업은 어때? 맛을 예민하게 평가하고 잡아내는 거, 미식평론가 같은 직업도 좋고.”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당시 담임선생님과 면담하던 중 선생님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순간 솔깃했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그걸 글로 쓴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고, 어쨌거나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길이라 선생님에게 그런 길도 있군요 하고 대답하고는 더 생각하진 않았었다.


선생님의 조언은 그 이후로도 한 번씩 생각났다. 누군가와 맛에 대해서 논의할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감탄할 때마다. 하지만 나의 직업을 가진 이후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다가 최근 남편이 해 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김치를 좋아하는 나는, 김치로 만든 거의 모든 음식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중 가장 대표적으로는 김치볶음밥을 좋아한다. 신혼 초기에는 남편이 그런 나의 취향을 반영하여 종종 해주곤 했었는데, 아이 것까지 함께 저녁을 만들다 보니 요즘엔 통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김치볶음밥 해줄까?라고 묻는 건 너무나도 근사한 제안이었다. 먼저 준비된 아이의 저녁을 먹이고 있는 내 앞에 멋지게 플레이팅 된 김치볶음밥이 한 접시 놓였다.


한 입, 두 입 맛있게 먹다가 남편에게 불쑥 물었다. “김치밖에 안 넣었는데도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어?” 그리고 그런 내 말에 남편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들어간 재료가 8가지는 넘어.”


대답을 듣고 다시 한 숟가락을 크게 퍼서 입에 넣고 천천히 먹어보니 다른 식재료들의 맛도 느껴지는 듯싶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확신은 할 수 없고, 정답을 듣고 나서 열심히 유추해 보는 정도였을 뿐, 만약 남편이 나의 질문에 그냥 빙그레 웃고 넘어갔다면 역시 내 생각이 맞는구나 하고 끝까지 먹었을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며칠간 맴돌았다. 나는 본래 짠맛에는 민감한 편이라서 짠 음식과 안 짠 음식은 잘 구분하는 편인데 그래서 맛도 예민하게 느낀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짠맛을 제외하고는 미맹에 가까울 정도로 맛 구분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나 싶은 것이었다. 동시에 20년도 훌쩍 넘은 선생님의 옛 조언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그때 선생님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그 길을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물론 이어졌다.


감각은 길러지기도 하지만 본디 타고나는 것이 크다 생각하는 만큼, 아마 그 길을 가다가 어느 순간 한계가 왔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선생님의 조언의 적절성을 가늠해보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건네는 조언의 무게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볍게 던진다고 상대가 꼭 가볍게 받으리라는 법은 없다. 반대로 무겁게 건네는 조언 역시 상대가 받기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진다.


라떼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도 장유유서가 기틀이 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른의 흔한 인사말이자 권리처럼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은 늘 있어왔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서는 아빠와 남동생이 군대 이야기를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고정 레퍼토리 중에 하나였는데, 아빠의 라떼 이야기에 동생은 지금은 또 그렇지 않다로 맞불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대가 달라진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겪는 당사자가 같은 사람도 아닌데 구전동화처럼 왜 ‘나 때는’이라는 표현이 대물림되는 느낌인 걸까. 그것이 한참 궁금했던 20대가 지나고 나니 나도 한 번씩 그 표현을 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변명을 해보자면, 사실 그건 조언의 탈을 쓴 하소연에 가깝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고 그 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에, 말을 하면서도 이것이 수용되리라는 기대감이 없다.


한편 이렇게 벽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과 다르게 꼭 수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건네고 싶은 조언들이 있을 때가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건강을 오래 유지하길 바라는 부모님께,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친구에게 등. “이걸 이렇게 해야 좀 더 편하고 효율적이지 않겠어?”, “암 걸릴까 봐 무서워하시는 분이 술을 이렇게 드시면 되겠어요?”, “진짜 너를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길이 뭘지 잘 생각해 봐” 같은 조언들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이가 되니 어떤 말도 쉽사리 꺼내기가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알아차리고 개선되는 경우가 꽤 있기에 나의 조언이 적절한 시기를 타지 않으면 잔소리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뿐이다. 또한 이미 본인이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에 조언 대신 공감을 해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입을 다물면서 한편으론 생각한다. 누군가의 조언에 나는 얼마나 열려 있는지, 하고.


뼈를 때리는 사실 기반의 조언들을 가장 많이 건네는 건 늘 나 자신이다. 타협하고 살던 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도, 더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도 늘 나 자신이다.


하지만 그 말을 타인에게서 들으면 아픔과 동시에 날을 바짝 세우게 된다. 원래의 성향도 그랬던 것 같은데 어찌 된 것이 나이가 들수록 그 정도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는다. 그러하니 다시 나의 입을 다물어본다. 상대에게 필요한 건 정말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어떤 길에 서 있던 그 길에서 치열하게 살아냄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여.


먼저 조언을 건네고 싶은 사람에게는 입을 꾹 다물고 버텨보아야지. 조언을 혹 물으러 오는 이가 있다면 그때는 그가 처한 상황을 마음껏 응원한 이후에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게 건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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