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치 마사코
| 숫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키... 전혀 상관없죠. 나이도 전혀 신경 안 쓰는데요. 미래의 애인이 누가 될지 어떻게 알고 상대의 키까지 미리 내가 정하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의미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 이상 버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붙인다고요? 있을 수 없는 일인데요. 실업률이 이렇게 높은데 착실하게 사는 것만으로 저는 만족해요. 경제적으로 기댈 것도 아닌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아멜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프랑스 여성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자신과 대등한 상대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이 많든 명예가 높든 나와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면 부러운 마음도 들지 않는다. 당연히 결혼으로 인생을 바꾸려는 생각은 없다.
"가정을 꾸릴 준비가 된 사람이 좋아요."라는 그녀가 무척 견실해 보인다. 프랑스 여성은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는 것 같아도 진정한 사랑과 성실한 태도를 항상 품고 있다.
| 프랑스 여자는 80세에도 사랑을 한다
80세에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프랑스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나이에' '이제 와서 새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멋진 만남이라고, 사랑은 항상 멋진 일이라고 축하한다. 그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80대 마담의 사랑 얘기는 나에게 삶을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메르시, 지네트. 그녀 덕분에 80대가 되어도 생생하고 활기차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녀들이 실연에서 벗어나는 방법
실연에는 의욕을 불태우는 효과가 있다. 이 의욕을 살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연 후 인생이 확 달라진 발렌티노처럼 환경을 바꾸어 일운이 트이거나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는 여성도 있다. 더 예뻐지겠다는 동기부여가 생겨 미용과 패션에 신경 쓰거나, 계속 다이어트에 실패만 했는데 실연을 계기로 눈 깜빡할 새 다이어트에 성공하여 탄탄한 몸매와 반짝이는 피부를 손에 넣은 여성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프렌치 스타일 옷장
크리스틴이 침실 붙박이장 한 면을 보여줬는데 어찌나 깨끗한지 정돈된 모습이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붙박이장 안에는 옷이 빼곡히 차 있지 않고 공간의 4분의 1 정도 비어 있었다. 그래서 가방도 액세서리도 구두도 모두 한 곳에 수납할 수 있다.
"코트를 제외하고는 다 여기 있어요."
코트는 현관 옆의 붙박이장에 보관한다. 옷장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돈돼 있는 것은 옷의 가짓수가 적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옷만 두는 것인데 나머지는 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사지 않은 거다. 옷도 신발도 액세서리도 일정한 개수를 정해놓고 늘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크리스틴만 그런 게 아니라 프랑스인의 옷장은 대체적으로 이렇게 깔끔하다. 착용감이 좋고 자기다운, 정말 마음에 드는 옷만 갖춰놓았기 때문이다. 브랜드나 가격에서 집착하지 않는다.
| 화장의 숨은 역할
일할 때야 습관처럼 매일 화장을 하는데 사실 레아가 화장에 가장 공을 들이는 때는 휴일에 외출할 때다. 더 꼼꼼하게, 그러나 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정성을 기울인다.
"휴일이라고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편하게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레아가 화장에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편과 아들, 두 남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는 레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 지루한 미녀는 인기가 없다
"레티시아가 가진 에너지를 아주 좋아해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매장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70대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 그녀 역시 스타일이 만만찮다. 좋은 에너지는 옮아가는 것일까.
"레티시아는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 애인이 없다니 의외네요."
"인기가 많아 보여요? 제가 사람들을 좋아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레티시아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가진 매력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어 지는 사람이었다.
| 말을 아낄수록 섹시하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식상해 보여도 그 말은 진짜다. 자신은 겉과 속이 같다며 솔직함을 매력으로 어필하는 여자도 있지만, 단순히 솔직함만 드러내는 여자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의 원숙한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 무조건 100% 드러내는 것과 오픈 마인드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타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흙발로 타인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행시킨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초조해하지 않는다. 파티에서도 바로 명함을 주고받는 광경은 볼 수 없다.
사적 질문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 대신, 명함을 교환하지 않는 대신, 그들은 예술이나 책, 과학, 최근의 사회 동향에 대해 얘기한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자신도 어디까지 드러낼지 탐색해간다. ... 실비는 그 커플이 이혼에 이르기까지 불륜과 배반, 거짓말 같은 너저분한 드라마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통 때도 남의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나쁜 소식 같은 경우엔 굳이 먼저 전하지 않는다. 남의 비밀은 물론이고 자신의 얘기도 과하게 하지 않는다.
| 티켓은 항상 두 장
니콜은 가고 싶은 전시회나 콘서트, 연극 등이 있으면 항상 티켓을 두 장 사둔다. 한 장은 자기 것, 다른 한 장은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한 것으로, 그렇게 하면 누구든 함께 갈 사람이 생긴다고 한다.
사교란 절대 테크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 그 마음을 드러내는 말과 행동 등 속 깊은 사람의 태도로 이루어진다.
| 귀부인의 바캉스 노트
프랑스인에게 이상적인 바캉스는 일상생활의 연장으로, 바캉스 기간에 외식은 가끔 하지만 대체로 장을 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장소만 한적한 자연으로 바뀌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전 2주간 시골집을 빌려 평소와 다름없이 시간을 보내는데 그게 정말 좋아요. 그렇게 휴식을 취하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새롭게 솟아나는 것 같거든요. 긴 바캉스를 자유롭게 누리는 프랑스인들이 그래서 창의적인가 봐요.”
| 내려놓는 자의 미소
“그거, 제 얘기예요.”
옆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여성이 갑자기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기막힌 이야기의 주인공 산드린이었다. ... 산드린은 차분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어쩌겠어요. 방법이 없는데. 그래도 살아야 하잖아요. 어떻게든 되겠죠.”
백만장자가 될 뻔한 산드린, 그녀의 삶은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바뀌었지만 내면의 긍정과 쾌활함은 바뀌지 않았다. 마치 딴 사람 얘기하듯 담담하게 그러나 웃으며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낙천적인 성격 덕분일 것이다. 마음만은 이미 백만장자인 그녀다.
| 프랑스식 말투의 매력
일요일 아침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날치기를 당했다는 샤를로트.
"정말 다행이에요."
"샤를로트, 운이 좋았네요."
가방과 약간의 현금이 들어 있던 지갑만 잃었을 뿐, 다친 곳이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샤를로트의 얼굴도 점점 밝아지더니 "그러게요. 핸드폰과 집 열쇠는 주머니에 있어서 무사했어요."라며 미소 지었다. 며칠 후 다시 만난 그녀로부터 "장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은 거 있죠."라는 말을 들었다.
"가방만 날치기당한 게 정말 다행이라고요."
장은 '가방과 돈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사한 게 다행이다. 당신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감동적인 멘트로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프랑스인은 부정적인 일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데 정말 탁월하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그리고 별일이 아니어도 상대에게 힘이 되는 얘기를 아끼지 않는다. 원래 토론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긴 하다. 말을 꺼냈다 하면 멈출 줄 모르는 사람들.
어릴 적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듣고 스킨십도 듬뿍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은 애정표현에도 아낌이 없다.
| 존재감 자체로 빛나는 프랑스 여자들
젊어 보이려 애쓰지 않고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생을 즐기는 프랑스 여자들. 세련되고 이성적인 태도를 항상 지니고 살면서 설레는 사랑의 감정도 잊지 않는다. 프랑스 여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미학을 갖고 주체적으로 산다.
나이가 드는 것은 와인이 숙성하는 것과 같다.
나의 방백
한국 사람들은 대개 해마다 늘어가는 나이가 달갑지 않다. 이는 '나이'가 사회의 기준이 되는 문화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여성의 경우, 어떤 직종은 20대 초반을 선호하며, 그 이상은 아예 면접조차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를 봤다. 이처럼 젊음은 소중하지만 '젊음이 최고'인 우리나라에 비하면 프랑스 여성들의 삶은 더욱 자유로워 보이고, 나이에 관한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아 보인다.
"나이가 드는 것은 와인이 숙성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너무 와 닿으며 멋지다. 젊음의 체력에서 나오는 활기/패기가 정말 좋지만, 젊음이 지나야 나타나는 원숙미는 더 고귀하다. 자연스럽게, 나이에 맞게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안티에이징'이라고 해서 주름을 막고자 크림을 바르는 것까지는 좋더라도, 그 크림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까지 필러를 맞아가며 굳이 인위적인 얼굴을 갖추고 싶지 않아 졌다.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폄하하는 경향의 사람들을 많이 봤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미국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직접 느낀 바로는, 우리나라의 현주소는 '이기주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인 미국인은 자신과 자신의 공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배려를 한다. 예를 들어, 자신만의 space를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상대 먼저.'라는 태도가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자신'이 중요하므로 자신이 우선이어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크게 보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즉 "학용품을 남의 것처럼 소중히 다루자."가 아닌, "학용품을 내 것처럼 소중히 다루자."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모든 '개인'을 존중하므로 '나'도 소중한 것과 '나'만 소중한 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100%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일부 개인주의 성향은 닮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