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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osaur Aug 17. 2020

05 | 우리가 사랑한 얼굴들 - 1

신유진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부르면, 세르지 (연극배우)

우리는 바르셀로나에 갔고, 거기서 조금 머물다가 그리스로 갔지. 그리스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 지중해가 너무 아름다웠다는 것 밖에는. 배 아래로 수심이 5,000m였는데, 거기에서 잠수를 했어. 선장이 50~60m인 밧줄을 던지면 내가 그것을 붙잡고 가는 거지.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에는 백상아리가 많이 산대. 수면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그때는 몰랐어. 모르는 게 많아서 행복했던 거야. 


그래도 인생이란 모르는 거니까, 아프리카에 가서 뭔가를 팔게 될지 누가 알아? 나도 애초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고. 아니야, 그런 일은 하지 마, 제기랄, 모르겠어. 어쨌든 인생은 우리보다 힘이 세니까. 무엇이 돼서 어디에 있든, 그것이 좋든 나쁘든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만 잊지 마. 나는 66살이나 먹었지만, 이게 끝이 아닌 것을 안다고. 제기랄, 늙은이 같군. 이런 말은 한다는 것 자체가 늙은이 같아.


아는 여자, 배우, 사람, 카티 (연극배우)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 해피도 있고 새드도 있지만 엔딩은 없다. 죽음은 엔딩이 아니다. 기억은 죽음의 마침표를 말줄임표로 바꾸어 버린다. 점 여섯 개가 찍힌 그곳에서 말은 다시 가능성을 품는다. 입에서 입을 타고,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일을 꿈꾼다. 삶은 이야기보다 말, 언에 가깝다. 나의 말의 끝은 너의 말의 시작이고, 너의 말은 내게 와서 나의 말이 된다. 말에는 완전한 완성이 없다. 말은 바뀐다. 말은 이어진다. 말은 변한다. 말은 계속된다.


-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는 이미 오래전에 연극은 곧 사라질 예술이라고 예언을 했었죠. 카티의 생각은 어때요?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요. 하나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형태로 나아가겠죠. 그걸 나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잊힐 테고 우리가 해왔던 모든 방식들은 박물관에나 남게 되겠지만 한 번 존재했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해요. 공동의 기억 속에서 연극은 사라지지 않을 테고 누군가는 이어갈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일리아 (7세)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스스로에 물었다. 'ㄱ'에서 'ㅎ'까지, 'A'에서 'Z'까지 전화기의 목록을 뒤지듯, 머릿속에 저장된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며 누구일까, 보고 싶은 이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어떤 얼굴들은 다가왔다 금세 사라졌고, 어떤 마음들은 뿌옇게 밀려왔다 흩어졌다. 아니다. 이렇게 얕은 마음이 보고 싶은 마음일 리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추위도 멀미도 모두 뛰어넘게 하는 간절한 그 마음은? 보고 싶은 마음이란... 아무래도 마음을 다시 배워야겠다.


그 애들이 구슬을 엄청 많이 따가는 게 너무 불공평해서 화가 나요. 그래서 싸운 적도 있는데, 엄마가 속이는 친구들에게 화를 낸 것은 제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줬어요. 대신 똑똑하게 화를 내야 한대요. 똑똑하게 화를 내려면 숨을 크게 쉬고 말해야 해요. 후, 한 다음에 또박또박 말해야 해요. 소리를 질러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욕을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에는 거울을 보며 똑똑하게 화내는 연습을 해요.


저녁을 먹고 나서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고 만화를 보기도 하고 아니면 책을 읽기도 해요. 옛날에는 책을 읽을 줄 몰라서 아빠와 엄마가 읽어 줬어요. 그러고 나면 잠을 자죠. 저는 잠이 드는 데 3시간이나 걸려요. 눈을 감으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을 자는 게 싫어요.


- 일리아,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음... 재활용을 해야 해요. 플라스틱을 따로 버려야 해요.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한국도, 프랑스도. 대통령도 그렇게 해야 해요!

- 오늘 인터뷰 고마워요. 이제 뭘 할 거예요?

당연히 물놀이를 해야죠! 여름이잖아요.


두부를 사러 가는 길에, 마뉘 (음악가)

다운로드한 음악을 플레이한다. 이어폰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좡좡 울린다. 얼터너티브 록도 프로그레시브 록도 내게는 낯설다. 마뉘가 언급했던 모든 밴드들의 음악을 들어봤으나, 음악을 잘 모르는 내게는 그저 어렵기만 했다. 막귀를 가진 나는 음악을 읽을 줄도, 해석할 줄도 모른다. 내게 음악은 편지다. 어떤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게 보내는 편지, 혹은 저만치 먼저 가 있는 내가 나를 부르는 편지. 뮤지션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플레이를 멈췄다. 그리고 최백호의 노래를 틀었다.


채식은 '울트라 주크' 순회공연을 하면서 시작됐어요. 저희는 유럽과 프랑스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동물의 복지와 과소비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비주류 세계에서는 낭비와 과소비, 플라스틱 사용, 환경에 대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적 개념들을 알게 됐어요. 저에게는 매우 새로웠죠. 공동체 생활을 하고 함께 친환경 농사를 짓고 화학제품 소비를 최소화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요. 그들 모두가 베지테리언은 아니었어요. 다만 동물들도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아니, 모든 타인들을 향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죠.


아주 작은, 다만 우아한, 퀴퀴 (공연가)

퀴퀴와 함께 작업했던 M에 의하면, 그녀는 어느 연출가와 함께 일할 때도 '퀴퀴스러움'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리본이 됐든, 주름이 됐든, 깃털이 됐든, 퀴퀴스러운 무엇 하나를 반드시 숨겨 놓는다고... 비록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런 그녀의 작업 방식이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는지, 누가 더 힘이 센 지를 겨뤄야 하는 '무대'라는 전쟁터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진 열 가지 것 중에 적어도 하나는 포기하지 않는 것, 아무도 몰라도 내가 아는 것, 내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아는 것.


제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여성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같은 여자들이었죠. 저에게는 38kg밖에 나가지 않는, 너무 작고 마른 몸이 늘 콤플렉스였거든요. 통통한 여자들을 보면 부러웠죠. 저는 곡선으로 그려지는 여성성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건 제 기준의 아름다움이지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결국 내가 좋은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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