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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osaur Aug 17. 2020

05 | 우리가 사랑한 얼굴들 - 2

신유진


자라나는 것, 엘리사 (광고업체 CEO)

새하얀 눈밭에서 고물차가 헛바퀴 질을 하면서 굉음을 내던 날, 줄기차게 내리던 눈이 낭만이 아니라 공포가 되었던 기억. 그 후로 겨울마다 스노타이어를 장착하면서도 이곳을 피했다. 꼭 가야 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눈이 녹을 때까지, 날씨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애써 나아가려 하지 말고. 그러고 보니 그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나보다 커다란 어떤 것을 이기려 하지 않는 것, 꼭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순응하며 사는 것. 시속 30km로 달려야 하는 길에서 빨리 가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면 그곳은 비로소 지름길이 됐다. 어떤 마음은 포기할 줄 아는 것, 그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는 삶은 겨울에 토마토 열매를 맺게 하고, 한여름에 빨간 사과를 깨물어 먹게 했지만, 확실히 억지스러운 것들은 '맛'이 없다. 여름의 탱글탱글한 토마토와 가을 햇살을 그대로 담은 사과의 맛은 '되는 대로' 순응하며 노력한 대가다. 나의 한계를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담아, 남은 것은 더 큰 것에게 맡겨 얻은 그것은 얼마나 새콤달콤한 맛인가! 그래,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맛있는 삶을 살고 싶다.


- 그런 시간을 갖는 게 일상에서는 불가능할까요? 모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여행을 통해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저만의 방식이지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내가 그런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거겠죠. 얼마나 시간에 인색한 시대예요! 요즘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시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요? 문화적인 활동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하셨는데, 이제 조금 해소가 됐나요?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일단 파리에 살면서 누렸던 것들을 이곳에서 그대로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바꾸었어요.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게 변화하는 게 당연한데 자꾸 놓친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건 바보 같잖아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만족하기로 했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죠.


- 마지막으로 중간평가를 내려볼까요? 캉탈에서의 삶, 어떤가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제 인생의 또 다른 시도였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죠. 다른 것을 경험했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조금 더 주체적인 사람이 됐다는 점이 무엇보다 뿌듯하고요. 그렇지만 여기가 제 삶의 종착지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른 곳이 또 기다리고 있다고 믿거든요. ... 저에게 펼쳐질 또 다른 삶을 준비하고 있어요. 자신도 있고요.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도전해 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건 분명하죠.


열매를 믿어요, 멜라니 (교사)

해변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선크림을 바르고 다닌 적이 없어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이 늘 멋지다고 생각해 왔어요. 제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주근깨를 '행복한 얼룩'이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그런지 남편의 얼굴에 주근깨가 생기는 것이 좋더라고요. 행복한 사람 같잖아요. 실제로 햇빛을 많이 쐬는 게 우울증 예방에도 좋고요.


아이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지만 둘째를 낳을 생각은 없어요. 아이가 외롭지 않겠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도 외동딸이었고, 아버지 역시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잘 알죠. 형제, 자매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외로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둘 다 모두 잘 살았거든요. 한 명만 낳겠다는 것은 저희 부부의 선택이에요. 아이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능하면 모두 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프랑스에서도 돈이 필요하죠. 현실적으로 저희들의 능력으로 둘은 힘들어요. 물론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본인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돈 때문에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무작정 남편과 제 삶을 희생시키고 싶지도 않고요. 저는 이것도 가정을 꾸려가는 지혜라고 생각해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고를 누리는 것이요.


- 아이에게 티브이나 스마트폰, 태블릿을 보여주나요?

전혀, 절대 보여주지 않아요. 교사로서 화면이 미치는 악영향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어떤 아이들은 세 살, 세 살 반인데 핸드폰에 완전히 중독된 아이들도 있어요. 그 아이들은 부모를 보면 흥분해요. 부모님에게 안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핸드폰을 가지고 놀고 싶어서죠. 저는 그게 너무 걱정스러워요. 게다가 인지 능력에도 문제가 생기죠. 다섯 살인 아이가 사람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자신들의 신체와 그것을 둘러싼 것들을 표현할 줄 모르는 거죠. 무섭지 않나요? 그래서 멜로디에게는 어떤 화면도 보여주지 않아요. 한 번은 유튜브에서 고래에 대한 영상을 5분 동안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컴퓨터에서 떼어내는 데 일주일이 걸렸어요. 아침마다 '고래', '고래!'를 외쳤죠. 고작 5분이에요. 5분 만에 그렇게 중독이 된 거라고요. 그 이후로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어요.


- 집안일은요? 나눠서 하는 편인가요?

그렇죠. 각자 덜 싫어하는 일을 맡는 것이 규칙이라면 규칙인데 거의 비슷하게, 공평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남편이 세탁, 다림질, 정원 일을 맡고, 대신 잔디를 깎는 일은 저도 해요. 남편이 주로 힘을 쓰는 일을 하지만, 그렇다고 힘든 일을 남편에게 다 맡기지는 않아요. 남편이 바쁘면 제가 하죠. 수영장은 남편이 관리하는 편이에요. 청소나 유리창 닦기, 화장실 청소 같은 것은 제가 하고요. 각자 잘하는 걸 하려고 해요. 일의 양은 되도록 공평하게.


- 신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 사고들을 볼 때마다 조금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나요?

아이의 미래가 두려운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가끔 제 아이에게 손자들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환경적인 문제를 봤을 때, 과연 제 딸이 할머니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환경적인 재난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엄청난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요. 이미 학생들 중에는 환경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들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죠. 어제 학생들과 토론을 했는데, 아이들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더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고민들을 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어야 해요. 자라나기도 바쁜 아이들에게 우리가 망쳐 놓은 내일까지 고민으로 안겨주는 것은 정말 가혹하죠.


- 당신의 삶에서 당신의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동물에 대한 사랑, 동물에 대한 존중이요. 저희 가족이 그래요. 반려동물들은 우리의 자식이었죠.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부모님이 늘 동물들을 정성껏 돌보는 것을 보면서 자랐죠. 다친 길고양이가 있으면 집으로 데려왔어요. ...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도 사랑할 줄 안다고 생각해요. 저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저에게 좋은 사람은 동물을 존중하는 사람이죠. 이런 마음을 제 딸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누군가의 바다, 장이브 (72세)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두바이에 갔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더라고요. 몇 년 만에 대도시가 되어버렸죠. 나는 좀 무섭더라고요. 세상이 그렇게 갑자기 바뀐다는 것이... 바다는 그대로인데. 바다는 그대로예요. 바다의 기분은 날씨에 따라 달라지지만, 바다 자체는 변함이 없죠. 바다는 늘 같아요.


에필로그 - 거기, 분명하게 있는 마음

프랑스를 떠난다. 17년 만에 돌아가는 것인가? 지금의 나는 어느 쪽에 고개를 두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편에서 보면 이별이고, 저편에서 보면 재회의 시간을 어떤 얼굴로 맞이해야 할까? 마냥 서운할 수도, 속없이 기쁠 수도 없는 마음에 묵묵히 거리를 걷는다. 찰나의 것들을 나 혼자만 알아채면서...

나만이 보았고, 나만이 알고 있었던 것들을 글로 옮기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누군가의 소중한 어떤 것이 나의 부족함으로 '없음'이 되어 버릴까 두려워 오래 망설였다. 아무래도 늘 그렇듯 나의 '없음'이 문제다. 그러나 나의 '없음'을 핑계로 '있음'을 외면하기에, 찰나에 목격한 모든 것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들이 가진 반짝이는 어떤 것, 그러니까 삶을 향한 마음들을.

나의 '없음'은 어쩔 수 없으나 마음만은 믿을 수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모습이 달라도 마음은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지난 17년 동안 무수히 경험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역시 마음을 담는 것이 아닐까. 글자 하나하나에, '없음'을 넘어선 나의 마음을 담아보았다.


나의 방백

책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은, 프랑스인 남편과 그의 아내이자 번역가로서 프랑스에서 17년 동안 생활하며 만난 지인들을 인터뷰하며, 그들 삶의 추억과 가치관을 담아냈다. (프랑스를 각별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프랑스다.) 나는 보지도 듣지도 혹은 상상도 못 한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듣고 경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마치 그 인터뷰 자리에 나도 함께 가만히 듣고 있던 것 같았다.

9명의 사람들. 각자의 색으로 반짝이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따듯함과 새로운 시각, 그리고 신유진 작가의 명료한 문체와 모호한 것을 비유로 담아낸 문장들 또한 이곳에 보관하고 싶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도 한국에서 지인들 중 유독 반짝이는 누군가의 삶과 가치관을 담아내고 싶어 졌다. 또한, 비록 미국에서는 못했지만 앞으로 만날 영국의 지인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반짝임을 글로 담아 좋은 영향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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