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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osaur Feb 08. 2020

03 |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 잘 살겠습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리기 전에 예상했던 어려움은 이런 거였다. '이걸 왜 나한테 줘?' 하는 눈빛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만 청첩장을 주기로 했고, 줄까 말까 싶으면 안 주는 쪽으로 하객 명단을 만들었다. '나는 왜 안 줘?' 때문에 곤란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따금씩 안부도 잘 없던 관계로부터 대뜸 모바일 청첩장을 받을 때가 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실을 맺으려 한다니, 정말 잘된 일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청첩장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힘내.'와 같은 매가리 없는 말처럼 "축하해."가 전부인 내 마음을 어쩌랴.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막상 결혼이 닥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쉬워서 청첩장을 뿌리게 될까. 생각만 해도 질색이라 소수일지라도 가까운 사람만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삼 년 동안 아무 교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재와 내가 하객 명단을 만들 때 세운 기준은 '이 사람이 결혼한다면 내가 기꺼이 결혼식에 갈 것인가?'였고 그 기준에 빛나 언니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첩장을 줄지 말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굳이 초대하지 않아도 서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도리어 내게 큰 서운함과 실망을 느낄 가능성. 결혼할 두 사람의 의견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큰 에너지가 쓰일 텐데, 하객 명단도 잘 고려해야 함을 배운다. 관계의 밀도와 이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르기에, 청첩장을 받은 애매한 관계에게는 참석이 내키지 않은 결혼식일 수 있으므로.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 원을 내야 오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이천 원을 내면 만 이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던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 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 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 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도리라고는 1도 없는 빛나의 행동,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알리 없는 재구는 답답함에 자신이 그냥 빛나 결혼식 축의금을 내주겠다고 하자 결국 주인공은 꾹꾹 눌러참은 화가 터지고 만다.

빛나랑 비슷한 사람은 살면서 꽤 봤다. 악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뻔뻔한 건지 둘 중 하나는 확실한 사람. 나이가 무색하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어중간하게 착해서 답답한 사람 등.

주인공이 재구에게 언성 높여 터뜨린 말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듯했다. 인정이 되면서도 새삼 씁쓸했다. ‘정'이라는 따듯한 정서가 있던 우리나라의 지금은 각박한 바람이 불고 있고, 이 바람은 어느새 ‘한국 문화’의 한 켠으로 자리 잡혔기에.


| 일의 기쁨과 슬픔

오전 아홉 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스크럼 시간이다. 스크럼이란 이천 년대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애자일 방법론의 필수 요소로, 우리 회사 같은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다. 데일리 스크럼의 대원칙은 이렇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 서로의 작업 상황을 최소 단위로 공유하면서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다.

‘스크럼.’ 우리 회사에서 매일 진행하던 아침 회의를 스크럼이라고 하는구나. 매일, 약속된 시간에, 앉아서, 트렐로Trello를 보며, 짧지만 길어지게 각자 이야기했다. 이슈가 있는 경우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회의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짧으면 30분 만에 끝나고, 길면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_-) 그래도 그 시간이 필요하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모든 포지션이 바빠서 매주 한두 번 크게 하고 종종 생략한다.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스타트업은 조직문화를 함께 만들어가는데 겹치는 부분이 꽤 있는 것을 보면 '스타트업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하하. 우리 회사도 영어 이름이 호칭이다. 회사 대표는 내게 무려 ‘평어’, 즉 반말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것도 면접 때. 존대는 업무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당시의 나는 미국에서 들어온 지 겨우 한 달째여서 수평적 문화라면 다 오케이였다. 출근 이튿날부터 평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영어 이름은 익숙하지만 한국인 대표에게 반말을 하는 것과 미국에서 부사장에게 “Hey, John.”이라고 하는 것은, 베이스부터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행히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놈의 'You' 때문에 나도 모르게 대표에게 '너'라고 했던, 뇌를 거치지 못한 에피소드는 여전히 지워버리고 싶다.

놀랍겠지만 평어 사용의 장점도 있다. ‘상사’라는 벽이 다소 허물어진 덕분에 아닌 건 아니라는 나의 의견과 이유를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 우리나라 특유의 '눈치'로 인해 해야할 말을 못 하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결과적으로 업무의 효율을 높였다.


여백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글쎄요.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 거예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아예 안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미국은 워라벨이 잘 잡혀있는 편이다. 야근이 필수가 아니며, 일 때문이 아닌 상사의 눈치 때문에 퇴근이 늦는 비능률/비효율적인 상황은 0에 수렴한다. 도리어 미국은, 야근을 한다는 것은 시간 내에 계획한 일을 다 못한 것이므로 업무 능력이 낮다고 보는 듯하다. 미국에서 일했던 회사는 휴가를 내는 것도 자유로웠다. 업무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휴일과 주말을 영혼까지 끌어 붙여 아등바등 휴가 내지는 않는다. 매우 바쁜 시기가 아니면 일주일에서 한 달까지도 다녀온다. 중요한 포지션인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휴가라는 자동응답 메일 설정해두고 자신의 휴가를 즐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개인을 존중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으로 돌아오면 이 워라벨이 무너질 거라는 확신에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지금 회사에서는 그래도 워라벨이 유지된다. 한국이 모든 직장인의 워라벨을 지켜줄 수 없다면 적어도 퇴근 이후와 휴가 기간에는 업무 관련한 스위치를 끄고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사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오가는 대화 속에 놓인 공기의 흐름이랄지, 기운이랄지, 그런 것들만큼은 언제든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지적 흥분으로 살짝 들떠 있었고 그건 분명 화학적 교감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맥락과 그로부터 비롯된 웃음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가만 보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아요."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가 물었다.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송지유는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부러지게 전달하는 당찬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다. 주인공을  내쳐버릴  있음에도 어르고 달래듯 거절하는 모습과 눈치가 빨라 남자보다 한수 위였다. 남자는 송지유와 마치 운명인  케미가 톡톡 터진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쿵하면 짝하듯 송지유는  웃고   놀렸다. 이렇게 대화가 즐겁고 너무  통하는 상대라고 거의 확신한 남자에게 송지유는 "우리,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 제가 말을 잘하는  아닐까요?"라고 하다니. 자존감과 자신감에서 뿜어지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 다소 낮음

"이 사람아, 잘 생각해야 돼. 요즘은 그냥 순간이야, 순간. 딱 한곡이라고. 이 많고 많은 유혹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삼분 정도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그걸로 된 거야. 최선을 다한 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는 진정한 음악은 풀 렝스 앨범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장님도 밴드를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곡과 곡 사이에도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고 스토리가 있는 건데, 그렇죠?"... "저는 곡이 한곡만 덜렁 있으면 뭐랄까요, 이를테면 뮤지컬을 보는데 인터미션부터 들어가는 기분 같아서요. 그러니까 소설책을 두 번째 장만 찢어서 가지는 사람은 없잖아요."

모든 게 '순간'인 요즘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3분의 딱 한곡이라. 일리 있는 말이었다. 요즘은 구구절절 긴 호소보다 중독성 있게 짧고 강렬함이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하지만 뮤지션인 주인공의 소신도 일리 있었다.

내 취향을 사로잡아 플레이리스트에 담게 되는 곡은 대개 앨범당 한두 곡이다. 플레이리스트에는 추억에 푹 잠길 수 있는 곡과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곡, 비트와 멜로디가 완전 내 타입인 곡, '이 노래 완전 내 얘기야'의 곡 등 내게 다양한 영향을 주는 곡들이 들어 있다. 나이에 따라 나도 영글어가면서일까, 요즘 나오는 국내 가요에 푹 빠지는 일은 잘 없다. 오히려 '역주행'이라는 말처럼, 감정이 온전히 녹아있고 여운을 남기는 올드 곡들에게 다시 찾아가게 된다.


유미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수없이 바랐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나니, 유미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었지만, 다시 이 집에서 유미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모습이, 그 자연스럽던 일상이, 이상하게도 이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 도움의 손길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삼십 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 탐페레 공항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때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생각과 적용

책을 읽는 내내 저자 장류진은 '반전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가시노의 책처럼 술술 쉽게 읽히면서 한 장 한 장이 내 머릿속에서는 영화가 된다. 히가시노처럼 반전은 없지만, '답정너'처럼 딱 확실한 결론이 아닌, 소설 속 에피소드 자체를 내 상황에 맞춰보며 남기는 여운들이 참 좋았다. 국내 소설은 내 타입이 아니라서 즐기지 않지만 이 책은 하루하고 반나절만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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