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베이징올림픽 남자 1,000m 쇼트트랙 경기를 보고
'분노'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쏟아지는 감정을 풀어낼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내 미천한 어휘력에 더욱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끓는 비속어를 속으로 삼키며 TV 채널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애써 옮긴 다른 채널들에서도 같은 화면이 나올 뿐이었다.
2022년 2월 7일, 오늘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남자 1,000m 쇼트트랙 준준결승부터 결승전까지 있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남자 선수들이 3명이나 출전하여 승리(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큰 날이기도 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 속에서 4년간 피땀 흘려 준비해온 선수들이 정당히 자웅을 겨루고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기를 그 누구보다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경기 중계가 시작되고 하얀 빙판 위엔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노력을 먼저 알리려는 듯 날이 선 자취를 쉴 새 없이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날자국들이 번잡한 경기 양상을 예고했던 걸까? 경기는 어이없는 실격 판정들이 난무했다. 순위가 분명하게 나오는 레이스 경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자신의 순위를 믿지 못하고 심판의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선수들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박장혁 선수는 준준결승에서 넘어지며 중국 선수의 스케이트 날에 손등이 베이는 부상을 입어 경기를 이어나가지 못했고, 황대헌 선수는 중국 선수 2명 사이를 물고기가 유영하듯 지나가 실격을 받았고(빙상 쇼트트랙 경기에서 혼자 물 흐르듯 수영을 해서 실격을 줬나 보다), 이준서 선수는 중국 선수와 동시에 출발했지만 무리하게 먼저 앞으로 나갔다고 실격을 받았다.(실력이 부족해 힘들어하는 다른 선수를 배려해 기다려주지 못해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났어나 보다)
쇼트트랙 룰을 모르는 일반인인 내가 봐도 '이거 이상한데. 혹시 중국 메달 따게 해 주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란 의심이 들 정도로 유독 중국에게 유리한 판정들이 반복됐다. 우스갯소리로 같이 TV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시합 전에 '이번 시합에 중국 선수 있어?'라는 질문과 함께 결과들을 예측하는 수준에 이르자 나는 지금 신과 함께 TV를 보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마 내가 쇼트트랙에 스포츠 도박을 했다면 그건 이제 더 이상 도박이라고 부르지 않고 적금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었다.
한국 선수가 빠진 뒤에도 경기는 더욱 가관이었다. 중국 선수 3명 모두 파이널 A로 진출했고 심지어 이 선수 중 한 명은 순위도 화면에 나오지 않는 선수였으며(이 선수는 뒤에서 막으라는 개인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건지 경기 내내 열심히 밀고 잡아 댕기고, 하물며 레이스 경기인데 앞을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보고 달리는 경지에 이르렀었다. 누가 보면 쇼트트랙 내 새로운 이벤트 게임이라도 생긴 줄 알았을 것 같다), 결승전은 경기 중반을 넘어갔음에도 재경기를 하고(아, 이때 새로운 게임 룰이 생겼었나 보다. 나보다 먼저 가는 사람 결승선에서 넘어뜨리기) 끝내 1등으로 들어온 헝가리 선수와 함께 넘어지면서 판정으로 중국 선수들이 금, 은메달을 나눠가져 갔다.
경기를 보는 내내 화가 났고 나는 연신 실소를 뿜어댔다. 이럴 거면 왜 순위가 있었는지 차라리 심판 점수가 있는 피겨 경기였다고 하면 납득이 갈만한 수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음에 작은 감사함을 표한다. 그동안 마땅한 개인기가 없었는데 덕분에 영화 해바라기 속 주인공의 성대모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내가 현장에 기자였다면 꼭 한번 중국 선수들에게 다음 질문은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메달을 따는 게 의미가 있나요?
이번 사건을 많은 외신에선 과거 '2002년 김동성-오노 사건'의 데자뷔라고 연신 보도를 쏟았고, 우리나라 선수단은 정식으로 CAS에 제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유독 쇼트트랙이 편파 판정이 많은 것에 대해서 심판장 1인의 비디오 판독을 통한 실격 처리 등 다양한 이유들을 사람들은 얘기한다. 그러나 사실 부당한 판정으로 인해 승부가 바뀌는 일은 쇼트트랙이 아니어도 스포츠 경기에서 빈번하게 존재해오고 있다. 그리고 비단 이건 스포츠 경기에서 만의 얘기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분명 중국 선수들도 이 올림픽을 위해 각자의 피땀 눈물을 흘려가며 준비해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이 상황이 만들어진 체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난하고 싶다. 심판은 왜 있는지, 규칙은 뭐하러 만들었는지, 스포츠맨십이란 것이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누군가에게는 좌절로 적용되어야 하는가. 당연하다는 듯이 주최국이니까 이번에도 이러겠지란 생각을 모두 다 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걸 극복해내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억지 긍정으로 합리화해야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건지...
기준이란 기본이 되는 표준을 일컫는다. 그리고 기본은 누구나에게 통용되는 시초의 규정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기준이 정말 기본이 되는 표준을 말하는 것이 맞을까? 나는 어느새 기준이 우리가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면죄부가 된 건 아닐까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이 든 데에는 기준을 만드는 주체가 권력의 주체와 부합한 데에 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공통된 표준을 만들어야 했기에 처음에는 조금 더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에서부터 점차 사람들을 부리는 집단 즉, 권력층으로부터 기준이 정의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준은 애초에 우리를 아니, 적어도 나를 위한 개념은 아닌 셈이다. 그저 조금 더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권력층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이번 쇼트트랙 경기를 통해 다시 한번 기준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쇼트트랙에서의 기준은 중국 즉, 주최 측이었다. '이번 경기에선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서 실격 처리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따라서 그들이 메달을 따는 데 우리는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메달을 딴 게 부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내 삶에서는 이런 부당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니꼽고 억울해서라도 어떻게든 기준을 만드는 위치에 올라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처럼 아니꼽고 억울함을 느낀 모든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p.s 대한민국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 파이팅, 그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 매거진 '새벽 세 시'는 '새벽 감성으로 적어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줄임말로 다양한 이슈, 감정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생각들을 적어나간 칼럼입니다.
* 이에 다소 직설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표현들과 독자님들의 다른 견해가 있더라도 그냥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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