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엄마들 사이에서 경상도 엄마를 둔 아이
사람의 일생에서 내 주변의 것들이 남들과, 다른 집들과 다르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첫 관문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비로소 다양한 타인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사람의 사회화 과정은 자기 정체성을 발견해가는 과정과 함께한다. 남과 다른 나, 남과 비슷한 나, 구별되는 나, 평범한 나.
나는 경기도 의왕시, 고천이라고도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왜 '태어났다고 한다'라고 하느냐면 내 기억에는 없는데 숫제 누가 말해준 것을 바탕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경기도 의왕시에 대한 기억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아주아주 어린 시절 아기 때의 빛바랜 사진 몇 장들에서 아 저기 나온 저 방, 저 집, 저 동네가 그 도시에 살 당시의 모습이구나. 인식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첫돌이 되기 전이었나 부모님은 연년생 오빠와 나를 데리고 서울시로 이사 왔다.
부모님은 둘 다 경남 출신이다.
엄마는 부산에서 자랐고 아빠는 경남 어딘가 작은 고장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살다가 이사를 자주 다닌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러다 성인기부터는 부산에서 살고 대학도 다니고 했었다. 그 두 사람은 각자 여러 번의 맞선 끝에 이번이 진짜 마지막 맞선이라고 생각한 선자리에서 만났고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80년대 후반의 사회는 왜 그렇게 서른 초입의 젊은이들을 결혼 못 시켜 닦달을 하며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을까? 하기사 그들이 그때 그렇게 닦달해대는 사회분위기에 휩쓸려 맞선을 마구잡이로 보러 다니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그들은 성인기에 수도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답게 경상도 억양이 짙었다. 엄마는 말투가 조금 더 상냥한 편이어서 그저 경상도 출신 여자구나 정도였고 아빠는 말투가 직설적이어서인지 경상도 말씨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그들 부부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서 아이들을 기르며 서울생활을 하였다. 아이들은 자라났고 우리가 살았던 그 당시 치고 제법 대단지였던 모 빌라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기르는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 가운데서도 벌써 경상도 출신은 우리 집뿐이었다. 가장 멀리 온 곳이 충청남도 어디 출신이었던 오빠와 나보다 네댓 살 어린 아주 작은 남자아이를 키우는 집이었고 대부분은 평택, 수원 등 경기도 출신들이었고 아예 서울내기들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우리 가족은 합정동의 그 좁다란 빌라를 벗어나 훗날 양화진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뀐 놀이터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오빠와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둘레둘레 살고 있어서 그 아이들의 집에 학교가 파하면 자연스레 놀러 가기도 하며 자랐다. 그때부터였다. 우리 집 부모님이 다른 대다수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다르다는 점을 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친구들 부모님의 말씨였다. 대부분 서울/경기지역 출신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었고 아무리 타 지역 출신이라 하더라도 억양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강릉이나 춘천이라던지 하는 식이었다. 서울에서 몇 년만 살다 보면 고향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은 얼추 자연스레 희석된다고들 하는 그런 곳 사람들 말이다.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정말 내 부모님들과 달랐다. 그들은 더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했고 아무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 무섭게 한다고 해도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친구네 집 엄마 아빠들과 비교해보니 과연 우리 집 부모님은 같은 말을 해도 그냥 긍정적인 내용의 말을 할 평상시에도 확실히 세고 날카롭게 들렸다. 그리고 그들이 화를 내거나 할 때면 더 억세게 들렸다. 지금처럼 어린 아동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휴대폰을 갖지 않던 그 시절에는 친구네 집 집전화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럴 때면 먼저 전화를 받곤 하던 친구들의 어머니들의 "여보세요~ 으응~ 우리 00 친구구나. 잠시만 기다려줘~ 00 불러줄게~" 하는 상냥함에 귀르가즘을 느끼기도 했었다. 반면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서 엄마나 아빠가 먼저 전화를 받았거나 아니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우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눠봤던 내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와, 너희 엄마/ 너희 아빠 말 되게 다르게 하신다"라고 말이다. 그때는 그 말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라면서 그 다름이, 달라서 특별하다고 하며 우쭐댈 수도 있었는데 되려 그 다름을 조금 불편해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나부터가 부드럽고 상냥한 말씨를 선호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그들의 말씨가 자식이면서도 사실 좀 이질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에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반에서 친하게 지내게 된 아이가 한 명 생겼다.
그 아이와 나는 하굣길 루트가 같아서 자연스럽게 집에 같이 가게 되었는데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그 전셋집 건물의 1층에는 제법 규모가 큰 횟집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낮에 거기서 일을 하셔서 그 친구는 일을 마치면 그리로 갔다. 하루는 그냥 우리 집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 아이의 엄마가 일하신다던 그 식당에 들러서 00 친구예요~ 하면서 인사라도 할 겸 따라갔던 적이 있다. 그때 내게 자상한 눈길로 인사를 하던 그 아주머니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아, 경상도 엄마다!
드디어 경상도 출신 엄마를 한 명 더 찾았다! 그런 반가움마저 들었다.
그러고서 나중에 그 아이와 단둘만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나: 접때 너희 엄마도 경상도 말씨 쓰시던데 경상도 어디 사람이셔?
친구: 응? 어디사람이냐니?
나: 아~ 우리 엄마는 부산사람인데 너희 엄마도 우리 엄마랑 비슷한 말씨 쓰는 거 같아서 말이야.
여기까지 나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말해주었는데 친구의 반응이 새삼 놀라웠다.
우리 엄마는 그냥... 한국사람이야.
그녀는 혼자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하다가 겨우 한 말이 자기 엄마는 한국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내 기억 속의 부모님은 다른 어른들과 대화할 때 "아 우린 경상도 사람들이라 말씨가 좀 셉니다"부터 시작해서 부산사람, 광주사람, 그런 식으로 지역명을 붙여 '어디 사람'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특히나 당시 외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였는데 외할머니와 외가의 원류는 제주도였다. 외할머니대에서 뭍으로 나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목포나 진도가 아닌 부산이라는 도시였기에 외삼촌과 엄마는 부산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가끔, 그때 외할머니가 목포에 터를 잡았더라면 우리 엄마는 전라도 사람이 되었겠지 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외할머니는 엄마가 결혼하고 난 뒤 다시 제주로 돌아가 그 길로 줄곧 제주도에 살고 계셨고 우리를 보러 서울에 오실 때면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오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제주도 사람' 인 것도 우리 집에는 거리낌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네 부모님은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았었나 보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친구의 어머니는 경남 마산에서 오신 분이셨다. 그때 내가 그 아주머니께 저희 엄마는 부산에서 오셨는데라고 했을 때 그 아주머니는 아주 반가워하셨다. 그러면서 느낀 것인데, 어쩌면 그 아주머니는 내심 동향인이나 비슷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거나 반가워했을지라도 서울생활을 하며 그렇게 큰 의식을 안 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내 부모님은 자신들의 지역색을, 지역적 정체성을 조금 더 많이 의식했던 것일까?
이 부분은 훗날 내 생애 전반에도 지속적으로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서울살이를 하는 경상도 출신 부모님. 자녀와 말씨가 다른 부모. 친척들과 사촌들과 모여도 오빠와 나, 그리고 그 당시 경기도에 살고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이미 고등학교에 다니던 둘째 큰아버지네 아들인 사촌오빠를 빼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만 말씨가 달랐다.
제주도에 사시던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을 앞둔 겨울방학에 노환이 심해져 장남이던 외삼촌 댁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방문 간병인을 두고 외삼촌은 외할머니를 모셨다. 외삼촌네는 부산이었다. 6학년 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린 부랴부랴 학교에 결석 통보를 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 3일 내내 우리는 외삼촌 식구들, 그리고 외숙모의 친정에서 온 조문객들, 외할머니의 제주도 친지들 이렇게 타지 사람들에 둘려 쌓인 와중에 애들은 서울 수돗물을 먹여 키워서 그런가 말갛게 이쁘다는 둥, 애들이 조곤조곤 서울말을 하니까 어쩜 저리 귀엽냐는 둥 저마다 한 마디씩을 했고, 게다가 장례식장 식당에 재첩국을 파는 분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어버버하고 있으니까 사촌오빠가 와서 해결해 주던 것들까지 사실 많이 낯설었다.
그러던 우리 집안에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우린 한동안 서울을 떠나 엄마의 고향이던 부산에서 살게 된 시기가 있었다. 그때에 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죄다 부산사람들인 곳에서 서울 말씨를 썼다. 그냥 그렇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남자를 사귀어도 경상도 말씨를 쓰는 남자는 만나기 싫었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냥 경상도 억양이 들리면 불편하고 낯설었다. 오랜만에 부산에서 나왔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한동안 안 듣던 억양이 훅 하고 치고 올라오며 귓가에서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안다. 그때 나는 그냥 경상도 말씨와 경상도, 부산 이런 것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내 인생에서 타인들과 달리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살아가게 되는 우리 집이, 아무리 그냥 신기해서 달라서 뭐 칭찬으로 좋은 의도로 그랬다더라도 아무튼 이래저래 원치 않는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들이, 그런 일들을 겪게 되는 부모님이, 그런 환경이, 좀 무난하고 무던하지 못하고 자꾸 혼자 도드라지는 것 같은 그 낯섦이, 이질성이 불편했고 부끄럽고 싫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든다. 당시 결혼을 갓 해서 직장 발령으로 경기도에 거주하기 시작한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을 경상도 출신 부모님과 그들이 마주했던 타지에서 타지 사람들과의 삶은 어땠을까? 그리고 다시 모두가 입성해 마지않던 서울에서 어린아이들을 키우던 그들은 자신들만 빼고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많이 외로웠을까? 그러다 여차 저차 하여 많은 사건들을 겪고 그래서였을까? 그들은 이제 더는 함께하지 않는다. 그사이 오빠와 나는 엄마와 함께 엄마의 고향인 부산에서 몇 년을 살았고 오빠는 대학을 서울에 붙어서 다시 서울로 제일 먼저 돌아왔고 나는 대학까지 거기서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고 엄마는 내가 이민나오기 얼마 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서울에 합류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온 그 서울에서, 오빠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엄마는 여전히 부산 말씨를 쓰고 서울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 세월 동안 타 지역으로부터 서울시로의 전입인구는 더욱더 불어났으며, 서울에서 나는 어디 사람이라고 두드러지게 말하는 식의 문화는 거의 없어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한집 걸러 타지인들이고 너나없이 먹고살기 바빠서 남이사 어디 출신이든지 어디 말씨를 쓰든지 말든지 자기 밥그릇 하나 제대로 챙기며 살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
정작 나는 그렇게 혼자만 다른 게 싫었다고 했놓고서, 기어이 이민까지 나와서 오래전 그 친구가 내게 했던 말처럼 '한국사람'이라는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그 아이러니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한편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만일 내가 여기서 자식을 갖는다면, 물론 그때와는 다른 맥락이겠지만, 그 아이도 자기 친구에게 "우리 엄마는 한국사람이야." 라고 하려나?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나는 조금 웃을것 같기도 하고 왠지 또 조금 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나는 아이를 와락 안아버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