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많은 내 안의 어린 아해에게
아해야, 아해야-
너는 겁이 많구나.
겁이 많아서 자꾸 숨는구나,
감추기 바쁘구나...!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에 대한 의구심을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글을 좋아한다고 해놓고서 생각보다 글쓰기에 할애하는 노력이나 투자하는 시간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작년부터 구독하기 시작한 유튜브 채널 <곽정은의 사생활>의 곽정은씨는 잡지사 기자 시절 격무에 시달리며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시절에도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도 매일 한 두 꼭지씩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꾸준히 써나가다가 차곡차곡 모두 아홉 권의 책들을 출간한 작가가 되었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여기 브런치에서도 꾸준히 시리즈물을 올리는 분들, 다양한 통찰들을 길이에 상관없이 열심히 발행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이들에 비해 정말 나는 진짜로 글을 쓰고 싶긴 한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일종의 허영이 아니었을지, 허상에 사로잡힌 듯 지금까지 그렇게 알량하게 그 허무맹랑한 말 뒤에 스스로를 숨기고 지내왔던 것이 아니었을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심리학에서 자기 방해를 뜻하는 '셀프 사보타주(Self Sabotage)'라는 용어가 있다.
이것은 한계와 장애를 만들어내서 목표를 향한 전진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행태를 뜻한다.
1.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
2. 나는 글쓰기가 좋다.
3. 글쓰기가 좋은 것은 자유함에 대한 동경이 크기 때문이고 자유함을 최대치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나는 글을 엄청 잘 쓴다는 망상을 만들어낸다.
5. 나는 글을 아주 잘 쓰고 나는 아무 글이나 쓰지 않고 그 이유는 나는 엄청난 글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6. 계속해서 이런 방향으로 허영심들이 덕지덕지 덧발라진다.
7.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붙들며, 아직 써지지도 않은 가상의 글을 소망한다.
8. 이제는 슬슬 진짜로도 써야 하긴 하는데 막상 손이 가지 않는다.
9. 지금 잠깐 뭔가에 가로막혀 그렇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그렇지 등등 핑계는 늘어난다.
10. 막상 정말로 쓰려고 하자니 써지는 문장들은 내 허영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미치겠다!
대체로 이런 열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다시 1번부터 사이클이 반복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자기 방해 수법은 과도한 자기 이미지로 스스로의 현실을 물 타기 해서 그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그 사이클이 감기는 동안 자연히 글쓰기를 미루고 유보하는 전형적인 테크닉을 구사해왔다. 언젠가는 진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글을 쓸건대, 나는 그런 사람인데 라는 생각을 붙들며 말이다.
자기 방해라는 방식의 방어기제를 사용한 이유는, 아니 무엇보다도 그것이 '방어기제'인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무엇을 그토록 '방어'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바로 그것. 두려움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두려웠을까?
내가 구축한 망상에 따르면 나는 글을 엄청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개털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나는 사실 글쓰기에 재능이 없으며,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이번 생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책을 낼 수 없고, 나는 작가가 될 수 없고, 나는 그저 망상 장애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을 덮으려고 오히려 더 어리석은 자기 방해를 감행해가면서 더욱더 결과물로부터 멀어져 갔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왜 자꾸만 실행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 습관화된 미루기, 학습된 불안감,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망상 체계를 조금씩 조금씩 해체시켜나가고자 한다.
해체 후 새로 주입할 사실에 기반한 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다.
1. 나는 글을 잘 쓰고 그냥 눈감고 써도 술술 써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2.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빈약한 콘텐츠를 가졌거나 이미 가진 콘텐츠를 글로써 발전시켜나갈 실력이 모자라다.
3.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브런치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4. 나는 다른 브런치 작가들처럼 다양하고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해 낼 실력이 아직은 안된다.
5. 따라서 내 진짜 레벨은 글쓰기 입문 자이다.
6. 따라서 브런치에서의 포지션 역시 브린이, 즉, 브런치를 막 시작한 어린이 같은 사용자이다.
7. 따라서 나에게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
8. 따라서 나는 계속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9. 나는 거창하게 출간 작가가 되거나 어떤 주목을 받을 생각으로 가 아니라 브런치를 나만을 위한 글쓰기 훈련장으로 활용하도록 해야겠다.
10. 나는 더 이상 나를 방해하기보다 나를 발전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10단계로 기존의 불건강한 허구적인 자기 인식을 대체하도록 해야겠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딴딴하게 굳어버린 에고를 다루는 작업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브린이 성장일지라는 형식으로 내가 글쓰기에 점점 근육을 붙여갈 수 있도록 글쓰기에 대한 고민, 희열, 걱정, 스트레스 그 무엇이 되었든 쓰기와 관련된 것들을 써 볼 참이다.
브런치 키드, 브린이라는 한 겁 많은 아해가 조금씩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실을 건강하게 마주하며 글쓰기를 정말로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새하얀 빈 페이지를 펼친다.
이제 쓸 일만이 남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