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회사만 나가면 창작열이 불타오를 줄 알았지
세계인이 애청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로 유명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 생:1695 ~ 몰:1741)의 직업은 사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걸 어쩌랴? 예술가로 태어난 자는 자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그는 얌전하게 사제 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다양한 기록들이 전해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는 미사를 집전하는 도중에도 악상이 떠오를 때면 뛰쳐나가 일필휘지로 오선지에 곡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미친 예술적 영감의 끝장판.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그는 <미사를 쫑내고 뛰쳐나간 신부님>이었던 것이다. 그가 성직자로서는 직무태만 죄를 적용받았을지 몰라도 그의 음악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애청되고 재해석되고 연주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이 비발디 님, 즉, 비느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금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브린이로서의 현실인식의 고삐를 붙들어 매야 한다.
나는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한 회사원, 퇴사원이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다. 이놈의 회사만 때려치우고 나면 그동안 나의 섬세하고 예민한 창작자로서의 감수성은 날개를 펴고 활개를 치고 높이 높이 비상할 것이라고, 그러할 줄로 믿었다. 그러할 줄로 소망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러하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거기서 결정적인 오류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이미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을 텐데 내 의식은 끊임없이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퇴사를 하기까지 오랜 기간 고민을 했고 퇴사를 감행하는 혼자만의 시크릿 프로젝트를 완수해나가며 내심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작정하고 글다운 글을 좀 써보겠노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재수 끝에 브런치 작가로 채택되면서 브런치라는 나름 'exclusive'한 글쓰기 플랫폼에 입성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나의 글쓰기 실력과 나의 빈곤하기 짝이 없는 콘텐츠 앞에 거의 무릎을 꿇었다.
'아, 어쩌지? 이런 시나리오가 아니었는데...!'
브런치에 입성하자마자 내가 했던 것은 퇴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퇴사 결심을 하기까지 100여 일이 넘는 숙려기간 동안 타사의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해보려고 합니다만>이라는 시리즈를 (브런치 매거진에는 제목에 글자수 제한이 있어서 '~퇴사합니다'로 발행함) 재발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종잣돈처럼 종자 텍스트로 활용해서 이걸 발판으로 뭔가 <이 시국에 외국에서 퇴사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만> 뭐 이런 식의 아류작들을 양산해볼 알량한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퇴사 그 자체만으로는 너무나도 빈곤했으며,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외국 어디, 어떤 업계, 어떤 구체적이고 감칠맛 나는 스토리를 어디까지 어떻게 오픈하며 꾸려갈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왜 이런 자각은 늘 뒤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콘텐츠 수용자에서 콘텐츠 제작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발걸음이다. 요새 속된 말로 개나 소나 크리에이터라고들 한다지만 정보의 수용자에서 정보의 공급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확장이다. 어쩌면 개나 소나 다 만들어내고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허물어졌고, 진입장벽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몰라서..'라고 문맹을 탓하던 시대도 애초에 지나갔고, '나는 종이 살 돈이 없어서..' 하던 시대도 지나갔으며, '글은 작가들만 쓰는 거지 나는 학교 때 국어성적도 낮아서.. ' 어쩌고 운운하는 각종 핑곗거리들은 그저 핑계를 댄 사람만 더 부끄럽게 만들 뿐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장편소설을 못쓰면 단편을 써봐라, 단편도 못쓰겠으면 엽편소설부터 시작해라, 그마저도 안 되겠으면 인스타그램에 카드 뉴스 형식으로 올릴 수 있는 몇 컷짜리 네모 박스에 몇 줄 정도 들어가게 해 봐라... 이래도 안 되겠으면 한 줄 소설 연재를 해봐라...
그래도 안 되겠으면.. 안 되겠으면.. 안 되겠으면...
방법은 무궁무진하고 도구들도 엄청나다. 이제 하다못해 가장 최후의 보루이던 '연장 탓'도 못한다. '장비 살 돈이 없어서', 혹은 '이걸 하려면 무슨무슨 툴을 다뤄야 하는데 그거 할 줄 몰라서' 그딴 말도 안 통한다.
특히나 글쓰기는 더더욱 얄짤없다. 글은 가장 아날로그 하고 가장 베이식한 여건만 되면 다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읽기만 하다가 이제 좀 써보려고 하니 왠지 나는 머릿속으로는 벌써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찍고도 남았는데 막상 한 줄을 시작하기까지 왜 그렇게 많은 고민과 좌절이 뒤따라야 하는지. 이제 정말 핑계도 못 대고 꼼짝없이 쓰기만 하면 되는 세상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져서 그런 걸까?
독자로 살았던 시절이 너무 길어서 막상 작가가 되려고 하니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치, 회사원으로만 줄곧 살다가 자영업을 하려 하니 막막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브런치에 입성해서 브린이로 글을 조금씩 써 나갈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즐거움은 서로들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데에도 있다. 타사의 각종 블로그들에서도 대체로 아이디에 '~님'을 붙여서 '누구누구 님' 이런 식으로 소통했는데 여기서는 작가님이라고 해주는 것이 아주 작은 것이지만 마음에 큰 차이를 만들어준다.
특히나 아직 관심과 사랑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린이 에게는 더욱더 중요하다. 어릴 때 주 양육자에게 지지를 담뿍 받고 자란 아이들이 자라서도 마음밭이 건강한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처럼, 브린이들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회사, 나처럼 예술적 영혼을 지닌 자유로운 한 마리 새에게는 걸맞지 않은 새장 같은 곳을 떠나면 나는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며 묵혀둔 영감들을 발산할 것이라는... 그런 망상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퇴사가 쏘아 올린 글쓰기에 대한 열망,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퇴사 전에도 나는 블로그에 그런 연재 포스팅을 올리기도 했고 다시 브런치에도 지원했고 글을 꾸준히 쓸 플랫폼들을 찾으려고 했듯이. 또 결국 찾아내어 기회를 얻어냈듯이. 올 한 해의 시작을 브런치와 함께 했듯이.
앞으로는 글쓰기를 잊을만할 때 팍 잊어버리지 않고 잊을만할 틈새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아보는 브런치 알림에서 많은 다른 작가님들의 생활한 이야기들을 접하고 또 나도 거기에 고무되어서 '뭐라도 써보는' 그런 시간들로 채워나가고 싶다.
"말할까 말까 하면 말하지 말고,
할까 말까 하면 하고,
쓸까 말까 하면 쓰고 보자!"
이제부터는 이게 나의 새로운 모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