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도 없는 난치병인 예술병을 들어나 보셨을라나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 시구를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박 준이라는 젊은 시인은 이 시구를 따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엮었다. 병을 낫게 하려고 약을 지어다가 먹는 것처럼, 당신의 이름도 지어다가 며칠을 그렇게 먹을 수 있구나- 아플 때 누구의 이름을 약처럼 지어다가 먹으면 더는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시구가 그렇게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이내 곧 커억- 하고 막혀 드는 그런 느낌.
사실 더 슬펐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 나는 절대로 이렇게 못 쓰겠구나...!'
세상에는 약 없는 병들이 많다. 의학기술이 발달하여 많은 병들의 원인이 밝혀지고 많은 치료약이 개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특히 마음에서 비롯된 병들은 본인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한 어떤 약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설령 의학백과사전 같은 곳에 등제되지는 않았더라도 충분히 많은 영향을 끼치는 상사병, 도끼병 같은 각종 것들의 상위 티어가 있다. 나는 그 탑티어급 병명은 단연 예술병이라고 본다. 예술병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자아도취, 과대망상, 인지부조화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참 슬프다. 약도 없는 것도 슬픈데 자기가 자기를 잘 모르고 있는 그 상태에 빠져 있는 모양새가 너무 슬프다. 쥐뿔도 없으면서 뭐 거창한 창작을 할 것이라는 미열에 들뜬 상태 같은,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야 그 삶이 유지가 되는 삶의 원동력으로 닦아 쓰이고 있다는 것이 애처롭지 아니할 수가 없단말이다.
예술병은 과도한 자기를 보호하느라 현실을 돌보지 않거나 현실의 상황을 외면하는 식으로 회피한다. 그렇게 회피하면 할수록 점점 더 현실로 돌아올 길로부터 멀어져만 간다. 그러느라 차라리 현실에서 노력을 기울여서 작은 결과라도 만들 수 있을 소중한 시간적 기회들마저도 자기 손으로 버리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나는 왜 이렇게 예술병 하면서 사설을 늘이느냐 하면 내가 이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예술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필요하다. 나에게 있어서, 각자에게 있어서 예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그토록 예술하는 것에 대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예술 씩이나를 하는 나를 그토록 추앙하게 되었는가?
나 같은 경우에는 예술가에 대한 동경, 허영 어린 동경 같은 것이 컸다. 어릴 적부터 컸고, 왠지 나도 조금만 서포트받고 그렇게 재능이 발전되고 꽃 피워질 수 있는 환경에 놓였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좀 괜찮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상한 피해의식마저 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인하려고 애쓸수록 내면의 수치감만 커져가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림도 깰짝깰짝 별로 잘 그리지 못했고, 글 쓰고 싶다는 것도 뭐 소설을 씁네 어쩌네 시를 씁네 어쩌네 개뿔 하나도 제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없다. 그러면서 가까스로 이제 이 나이쯤 먹고서 "아직 세상이 내 사유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지 때만 만나봐라-" 따위의 망상 테크트리를 타는 일은 멈출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예술가만 동경하다가 예술가도 못되고 그래도 되고는 싶고 그래서 자칭 일상 예술가 운운하며 그렇게라도 예술가 타이틀을 스스로 만들어 주려고 하고는 있다. 그래서 이게 병이다.
대신 이도 저도 못하고 있으니 죽도 밥도 못 만들어먹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는 더는 이런 지질한 상태로 나 자신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 뭐든 작게라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왔다.
코로나 시작 즈음부터 하여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알게 된, 정말 하루 반나절 정도 만나서 1대 1로 산책이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유튜버가 있다. 만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무심히 툭툭 내뱉듯이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을 그렇게 담백하게 할 수 있나 개인교습이라도 청해보고 싶을 정도이다. 늘 장황하고 대책 없이 우울한 나에게는 부재하는 능력이 있는 그녀가 나는 참 부럽다.
이 유투버는 활동명이 김 알파카 인 분이 운영하는 채널인데 채널명도 촌철살인 압권이다.
이름하여 <김 알파카의 썩은 인생>이고 영어로도 너무 반듯반듯, "Kim Alpaca Rotten Life"이라니 말 다 했다, 정말. 그녀의 많은 촌철살인 영상들 가운데 나는 단연 이것을 으뜸으로 친다.
썸네일 조차도 너무 정직하지 않은가?
재능은 그저 그렇게 운운하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졌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지속가능성이다. 지속해 낼 능력이 있는가, 그것이 재능이 아닐까 싶다.
이 영상에서는 직설적인 그녀의 화법대로 존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자기 앞가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생계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꾸준히 잔잔바리로 해나가다 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때가 올 것이다.
더 이상 어떤 환상적인 것에 빠져있느라 현실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흘려버리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 당연한 것을 예술병에 걸려있는 상태에서는 간과하기 쉽다. 천재적인 능력만을 찬양하느라 상대적으로 너무 평범해서 서러운 자신의 능력을 너무 저평가해버리면 안 된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이 늦은 밤에 꾸역꾸역 써 올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시인 박 준 같은 그런 서정적인 문장들로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을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을 채워나갈 때마다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일궈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싶다.
시원하게 뚝배기 하나 깨고서 정신 좀 차렸기로서니 꿈마저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점이 가장 두려웠다. 예술병을 고치고 나면 초라한 현실로 돌아와서 조각난 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망연자실 조각들을 세어보고 있을 청승맞은 내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꿈을 꿈으로 고이 모셔두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꿈을 조금도 움직이고 자라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꿈이 조각날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서사의 부재, 서사의 죽음이다.
서사는, 이야기는, 콘텐츠는, 살아가면서 뭔가를 꾸준히 하고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주체적 행위자로 살아갈 때 만들어지고 축적된다. 그러니 뭐든 조금씩이라도 해보는 일을 어떤 유혹이 닥쳐도 조금씩 조금씩 극복해가며 해 나갔으면 좋겠다.
지금은 새벽 1시 49분이다.
나는 오늘 글쓰기를 건너뛰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끝끝내 이 지점까지 이 글을 끌고 왔다.
나의 예술병도 뚝배기에 담아 넣고 팔팔팔 끓인 뒤 한소끔 식힌 뒤 와장창 깨뜨려버리고 이제 진짜 생활한 예술을 해보고 싶다. 가장 확실한, 출처가 명확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 아무리 좌절스러워도 조금씩이라도 표현해내고 창작해내는 그 수단으로써 나는 글을 택한 것이다.
쓰는 만큼 자라나는 성장기의 브린이는 이제 꿈나라로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