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긴 개뿔, 되려 너무 닮아서 탈이지
(커버 사진: Pexels)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거리면서도 남들과는 확연하게 다르기를 소망하며 살고 있다.
가급적이면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그런 사람들 눈에 들어서 그들만의 리그에 입성한다면 나도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그들 중에서 제일 특별하고 비범한 사람은 나였으면 좋겠다는, 그들 가운데 선택받은 단 한 명은 나였으면 하는 그런 선민의식을 포석처럼 깔아놓고 있다. 내 멋대로 급을 나누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내 멋대로 배척하고 내 멋대로 아첨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여기까지 쓰는데도 벌써 모순들이 치석처럼 구석구석 끼여서 악취를 풍겨댄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대변하고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설명해준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나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척도라면 나는 어디쯤 위치할까? 도대체 그 위치가 다 무에라고 나는 왜 여기에 이런 집착을 보이고 있는 걸까?
부엌에 들어가 제일 첫째 칸 수저류를 담아둔 서랍을 열었다. 저마다 엇비슷한 것들끼리 분류되어 담겨있었다. 먼저 숟가락들을 들여다보았다. 식사용 숟가락과 커피 숟가락처럼 한눈에 길이와 너비가 다른 것들을 빼고는 그냥 같은 종류 숟가락들끼리만 모아둔 칸에 숟가락들은 시간차를 두고 서로 다른 제품을 구매했다 해서 근소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저마다 엇비슷하게 서로 닮아있었다. 매 끼니때가 되면 음식을 차리고 그 숟가락 칸에서 아무 숟가락이나 꺼내 식탁에 올라가겠지. 저들끼리 아무리 나는 저 숟가락과 다른 숟가락이라고 우긴다 한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고 그런 숟가락들이니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이 있다. 과학자들이 들어놨더라면 발끈할 말이겠다. 하여 이를 적당히 ‘유사 과학’ 쯤으로 해 둬 보겠다. 십대 시절 읽기 시작한 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를 통해서 ‘초록은 동색’이라는 표현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줄곧 이 표현을 좋아했다. 처음 접했던 미성년 시절의 감수성에 왠지 이 말은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 말보다도 더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름이나 디테일적 모양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그 성질은 같은 것들, 또는 그런 것들끼리 어울리는 습성. 한두해 지나면서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만큼 더 살면 살수록 인생의 소름 돋는 몇 가지 법칙들 중에서 이 동류성이라는 것의 적중률 앞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지금껏 살면서 맺어왔던 많은 관계들을 되돌아본다면 두 번 돌아보기가 무서워질 만큼 ‘결’ 과 ‘색’이 유사한 것들이었다는 사실만을 마주하게 된다. 친하게 잘 지냈던 사람들,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사람들, 처음엔 원수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찰떡궁합을 자랑했던 사람들, 정말 반대 스타일인데 의외로 잘 어울릴 수 있었던 사람들 모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유사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직장이나 주어졌던 업무들도, 그걸 하느라 알게 되었던 사람들도 보면 이런 동류성의 법칙이 작용되었던 사례들이 참 많다. 맹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잘 지냈던 사람들, 하면서 즐겁고 보람찼던 일들 뿐만 아니라 살면서 욕을 유발했던 사람들과 일, 직장, 동네/장소 이런 것들까지도 이 법칙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둔하리만치 간교한 이기적인 속성에 의하면 달면 삼키고 싶고 쓰면 뱉고 싶은 마음이 노상 일어난다. 하여 내가 원하는 집단이나 사람들과 닮았다 하면 역시 그래서 우리가 닮았던 게로 군 하며 좋아라 하지만 내가 싫었던 것들과 닮아서 만나게 되었던 거라고 하면 입에 거품이라도 물 기세다. 어디 그딴 것들에 나를 갖다 붙이느냐며 노발대발하거나 꽁하게 토라져서 집에 돌아와서는 몇 날 며칠을 분해서 끙끙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이래서 무서워진다. 내가 지금 관계 맺고 있는 것들, 내가 한때 관계 맺었던 것들, 자의적이었든 타의적의 었든 그렇게 어떤 계기가 있어 맺어졌던 것들 중에서 내가 좋아해서 유지하고 있든 싫어하지만 마지못해 유지하고 있든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설명하는 것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뜨끔해지면서 긴장모드에 돌입한다.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대목쯤에서 야트막한 언짢음을 느꼈다. 돌아와서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잔상처럼 그 말을 들은 순간이 재생되었고 그것을 여러 번 곱씹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도 제 앞가림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개입을 하려고 하냐는 마음만으로 도배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물론 이번에도 그런 마음들이 초반에는 우세했으나 수년간 받아온 심리상담의 효과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인지, 뒤이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나고 온 그 사람은 친구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다른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바로 나의 친구이다.
나의 친구라는 말은 내가 친교 하기로 선택해서 결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선택과 결정을 했다는 것은 어울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려는 습성이 있다.
내가 이 사람을 친구로 삼으려 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내게 편하고 좋은 점도 비슷하겠으나 내가 싫어하는 점도 비슷할 수 있다.
그 친구의 어떤 언행이 거슬렸다면 높은 확률로 나 역시 그런 언행을 해왔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와 관계 맺은 타인을 향한 원망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런 점은 없었나를 먼저 살펴봐야겠다.
허나 내 안에 그런 점이 있음을 자책하고 비난하고 비하하지는 않는다.
그저 지켜본다. 이 과정에서는 가치판단은 일시 정지한다.
내가 여기서 타인의 욕을 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짓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내 선택에 의해 맺어진 관계 가운데 드는 회의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책임은 타인에게 있지 않고 내게 있다.
내 안에 그런 점이 없었다면 그 부분이 불편함으로 감지되지 않았을 것임을 이해한다.
그 점이 정히 싫다면 내 안에 그 점을 개선해보거나 적어도 거기에서 끄달리지 않게 자유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내가 먼저 달라지고 나면 더는 그 점에서는 그 사람과 나의 닮음이 전만큼 강하지 않아 마음에 거리낌이 줄어들 것이다.
다시 한번, 내가 선택한 것들은 모두 내 소관이라는 점을 상기한다.
아무리 달리 생각해 보려 해도 생각을 하며 할수록 이것 하나만큼은 또렷해졌다. 내게 있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마음에 호불호, 미추, 선악 등의 가치판단을 불러일으킨 모든 것들에 나의 모습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참 이상도 하지. 좋은 것들,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이라면 일면 이해도 간다만 왜 싫은 것들에도 내가 들어있느냔 말이다. 더욱 점입가경인 것은 내가 너그럽게 넘어가지 못하는 부분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깊숙하게 눌러 담아놓은 제일 은밀한 본성이 비친 거울 이미지인 경우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 싫다 불편하다 이런 사람은 아니다, 이런 일은 아니다 하면 할수록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나를 설명해주는 꽤 정확한 데이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끼리끼리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듯이. 초록은 동색이듯이. 저자들이나 나나, 비스무리한 깜냥에 비스무리한 습을 가진 부엌 서랍장 속 수저들처럼 제아무리 나는 저들과 다르다 해도 도긴개긴 오십 보 백보, 도토리 키재기인 것들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분한가? 싫은가?
그렇다면 제일 먼저 돌아봐야 할 곳은 자기 자신이다.
다 됐고 다 듣기 싫고 나는 이제 다른 색을 원한다, 나는 더는 여기에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섞이고 싶지 않다, 나는 기왕이면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거기에 걸맞은 멋있는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다는 열망만이 강렬해진다면,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들여다봐야 할 곳은 자기 자신이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의지와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내리게 될 수많은 선택들의 과정에서 나는 꼭 그만큼에 걸맞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교류하게 될 것이고 그런 장소들에 가게 될 것이고 그런 일들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화하고 번드르르한 말로 윤문을 하려고 해도 결국 ‘도긴개긴’, 비스무리한 것들이 끼리끼리 함께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이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정확해서 더 무서운 삶의 진실 같다는 생각만큼은 떨칠 수가 없다.